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마무리 즈음에는 종종 이런 질문을 서로 주고받는다.
"그래서 오늘 당신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우리의 대답은 항상 같다.
"우선 걸어 다니면서 분위기 좀 감상하려고요."
가끔은 투어나 액티비티를 신청해서 즐기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 여행 스타일은 별 정해진 계획 없이 발 닿는 대로 그 공간을 느껴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중세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걷기만 해도 좋은 이곳은 서유럽 여행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주기에 충분했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
에든버러 대학이 보이는 언덕
어느 공작의 동상
빅토리아 스트리트
로열 마일
구시가지는 메인 거리인 로열 마일과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고딕양식의 묵직함과 세련됨이 온 도시를 채우고 있다.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중세와 근대 그 사이 어딘가에 뚝 떨어진 기분이 든다.
로열 마일 거리에는 빼곡히 기념품점들이 서있는데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인 킬트와 근현대의 대표적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인 베레모들이 전시되어 있다. 홀린 듯 한 매장에 들어가 진청색 베레모를 써보기도 했다.거울 속 모습에 피키 블라인더스(1차 세계대전 이후 더블린에서 시작된 갱단)가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다가 가격표를 보고는 살포시 내려놓았다.
빅토리아 스트리트에서 오르막을 따라 올라와 로열 마일로 이어지는 부분에 있는 어느 교회
에든버러의 버스킹은 기타보다 백파이프 연주가 더 흔하다. 연주자들은 파이프에 연결된 공기주머니를 한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트럼펫을 불듯 양볼이 볼록하게 파이프를 물고 연주에 집중한다. 백파이프 특유의 밀도 있고 단단한 소리가 귀에 꽂힌다.
에든버러는 고딕 건축이 매력적인 또 다른 도시인 프라하와 조금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부드러운 현악기 선율이 흘러나왔다면 '어, 프라하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힘찬 백파이프 소리가 튀어나오며 '아니야. 에든버러야!' 하고 그 정체성을 못 박는다.
백파이프 연주자들은 대체로 다부진 체형에 충분한 공기압을 파이프에 불어넣을 수 있는 강한 복부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 젊은 연주자는 나와 비슷한 정도로 마른 데다 안색도 파리한 것이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파이프를 불 때는 작은 두 볼이 금세 터질 듯이 달아올랐고, 공기주머니를 짜내는 이두와 삼각근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떡해.. 진짜 잘하고 열심인데 체력이 부족해 보여."
연주 실력은 좋았는데 몇 초 불다가 폐활량 부족으로 쉬고 또 쉬는 모습이 짠했다. 이마엔 앞머리가 촉촉하게 땀까지 흘렀다. 나와 남편뿐 아니라 다른 행인들도 그의 주변에 모여 연주를 멈출 때마다 박수를 치며 응원해 주었다. 우리는 작은 돈을 그의 악기 가방에 넣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의 가방은 다른 어느 연주자들의 것보다도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엘레펀트 하우스
해리포터 뮤지엄 겸 기념품샵
영국 여행 중 들러야 할 명소들의 목록에는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K롤링과 관련된 장소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에든버러에도 엘레펀트 하우스라는 카페가 조앤 K롤링이 머무르며 작품을 썼다는 장소로 알려져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모았다. 우리는 해리포터의 팬은 아니어서 밖에서 입구 사진만 찍었지만 해리포터나 그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들러볼 만하겠다. 근처엔 해리포터 뮤지엄이라는 이름의 작은 기념품점도 있다.
빨간 전화부스 하면 런던이 떠오르지만 에든버러의 것도 못지 않게 예쁘다.
사진을 찍는 것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지만, 에든버러는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자주 꺼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글을 쓸 때도 다른 글에서보다 더 고심했던 것이 바로 사진 고르기였다. 여타 도시들에 비하여 찍은 사진이 월등히 많았기에 그중에서도 잘 나온 걸 거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에든버러에서는 그냥 숙소 앞 대문만 찍어도 그림처럼 보이는 마법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어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월터 스콧 기념비 앞의 풀밭은 앉거나 비스듬히 누워서 버스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쉬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그 모습만으로도 한컷의 풍경화가 완성된다.
또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가면 밀크맨 커피라는 카페가 있다. 남편이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구글맵에 저장해 놓은 장소인데 마치 외딴 성의 숨겨진 탑처럼 생겼다. 원통형의 외벽에 난 큰 창문 앞에 앉아, 특히 비 오는 날에 찍으면 더욱 신비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에든버러가 낳은 스코틀랜드의 대표 작가, 월터 스콧 기념탑
밀크맨 커피
번화가도 좋지만 좀 더 걸어서 작은 강이 흐르는 조용한 타운 '딘 빌리지'도 잊지 말고 방문해야 한다. 졸졸 흐르는 개울과 담장에 이끼가 자라는 오래된 집들을 보자 갑자기 전원으로 이동한 것 같다. 천천히 물을 따라 걸으면서 동행과 얘기도 나누고 조깅하는 마을 주민들과 눈인사도 하고 조그마한 아치형 다리에 기대어 쉬기도 하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딘 빌리지
어스름 속 샬럿 광장
월터 스콧 기념탑 야경에 난입(?)한 장난꾸러기 에든버러 청년
국립 미술관 앞 잔디밭에서 바라본 야경
"지금까지 중에 다시 가고 싶은 장소 한 곳만 뽑으면?"
"음. 나는 에든버러. 눈 오는 겨울에 다시 와서 폰이랑 인터넷 다 끊고 동네 산책만 하면서 일주일 정도 지내고 싶어."
"나도 같이?"
"아니 여보 빼고. 큭큭."
아직 더 많은 여정이 남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에든버러가 남편 마음속 돌아가고 싶은 곳 1위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서유럽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그리고 우린 다시 지도 위에 새로운 이동경로를 그릴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