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고에는 유명한 동상이 하나 있다. 현대미술관 앞에 서 있는 초대 웰링턴 공작의 동상이 그것이다. 위엄 있는 자태로 말 위에 앉은 공작은 뜻밖의 고깔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는데, 이게 바로 이 동상이 유명해진 이유가 되었다. 과거에 어느 취객이 공작의 머리에다가 교통 고깔을 씌운 뒤로 줄곧 머리에 고깔을 쓰게 되었다는 불쌍한 웰링턴 공작. 시에서 이를 치워도 보았지만 그 뒤로도 누군가에 의해 자꾸만 다시 씌워져 이젠 그대로 놔둔다고 한다. 웰링턴 공작이 잉글랜드 출신이라서, 잉글랜드와는 앙숙인 스코틀랜드에 속하는 글래스고의 주민들이 이를 별로 곱게 보지 않아 장난을 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야간버스에서 내린 이른 새벽. 고깔을 쓴 웰링턴 공작이 글래스고에 온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우리가 갔을 땐 공작과 커플로 말까지 고깔을 쓰고 있어 그 익살스러움이 두 배였다.
유럽 여행 내내 카우치서핑 숙박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영국에서는 운이 좋았는지 글래스고에서도 요청수락을 받았다. '도지'라는 이름의 호스트는 글래스고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중앙역에서 기차로 20여분을 달린 다음 기차역에서부터 도보로 20분을 더 걸어서 도지의 집에 도착했다.
글래스고 중앙역
도지네 집에 가는 길. 새벽비에 젖은 조용한 동네가 평화롭고 예쁘다.
"안녕!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도지는 키가 매우 커서 나와 남편은 고개를 위로 확 젖혀 인사를 해야 했다. 곰돌이 푸처럼 순하고 착한 인상의 도지는 2층의 손님방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피곤할 텐데 자고 싶으면 좀 자도 돼요."
"앗.. 그럼 그래도 될까요? 정말 고마워요!"
야간버스 안에서 선잠을 자면서 온 터라 마침 눈이 슬슬 감기고 있었는데 친절하게도 도지가 먼저 자도 된다고 말을 꺼내 주어서 우린 편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푹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는데 같이 산책하러 갈래요? 하이랜드 카우도 있는데."
"좋아요. 렛츠 고!"
도지의 안내로 우리는 아침 산책을 가게 되었다. 근데 하이랜드 카우가 뭐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던 나는 소 이름이 참 독특하다 생각하며 공원을 걸었다.
"저기 있다! 쟤가 하이랜드 카우예요."
저기 초원에 앉아있는 하이랜드 소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와.."
덩치도 엄청 크고 뿔도 무슨 야크처럼 끝부분이 휘어서 이제껏 보아온 황소나 젖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좀 더 걸으니 더 많은 하이랜드 소들이 보였다.
"이렇게 잘생긴 소는 처음이야!"
눈을 다 덮도록 내려온 하이랜드 소의 앞머리는 트리트먼트 샴푸로 감은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손으로 살살 빗어주고 싶었지만 뾰족한 뿔을 보니 선뜻 만지긴 무서웠다.
콧구멍이 너무 귀엽다.
핸-썸
딴 데 보고 있을 때 슬쩍 만져 보기
아직 앞머리가 덜 자란 송아지도 있다. 너무 귀여워!
공원은 꽤 커서 한 바퀴를 돌고 나니 가볍게 등산을 한 것처럼 배가 살짝 고파왔다. 우린 동네 빵집에서 가볍게 요기를 했다. 도지가 고른 빵은 다진 소고기가 촉촉하게 안에 들어있는 빵이었는데 우리가 고른 빵 중에 가장 맛있었다. 그 뒤로 우린 빵집에 갈 때마다 그 빵만 사서 먹었더란다. 역시 현지인의 선택을 따르면 실패하지 않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래스고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셋이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도지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맥주 마실래요?"
도지가 건넨 건 캔맥주였다. 가방 안에 뭐가 들었나 했더니 캔맥주였다니. 엉뚱한 도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우리는 맥주를 받아서 홀짝였다. 근데 잠시 뒤 도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헉. 맥주 숨겨..!"
검표원이 복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캔을 기차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도지가 소곤소곤 말했다.
"기차에서 술 마시면 벌금이거든요.."
뭐?! 이제 보니 이 친구 정말 못 말리는구먼.
캡슐처럼 생긴 메트로
처음 간 곳은 글래스고 식물원이었다. 나나 남편이나 식물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스산한 글래스고 날씨를 피해 따뜻하고 촉촉한 온실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메리카부터 아프리카까지 온 대륙에서 데려온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온실이었다.
글래스고 식물원에서
식물원을 나와서는 글래스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을 입은 신사분이 걸어오시길래 우와하고 쳐다보았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여쭤볼까?"
남편이 다가가 사진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초록과 감색이 섞인 체크무늬 치마에 검은 스타킹이 잘 어울렸다. 스코틀랜드의 추운 기온에 맞추어 남성들도 치마를 한 겹 더 둘러 입는 패션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건축가 매킨토시 벽화 앞에서
글래스고의 거리엔 섬세한 벽화들이 많다.
조지 광장
늦은 오후에는 글래스고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올랐다. 본디 공동묘지인 이곳은 전망이 좋아 동네 사람들도 관광객들도 찾는 장소가 되었다. 올라가는 길에는 6.25 전쟁 참전용사를 기리는 기념비도 서 있었다.
묘지에 앉아서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어둑해져 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스코틀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진갈색, 진회색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한창 감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도지가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뒤지더니 또 하나의 캔맥주를 건넨다.
"맥주 한 캔 더 할래요?"
볼수록 재미있는 친구일세. 작은 가방에서 맥주가 몇 캔이 나오는 거지?
글래스고 공동묘지 전망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밤거리
도지는 오늘 캔맥주만도 여러 개를 마셨는데 밤이 되자 라이브 바에 우리를 또 데려갔다. 유럽을 다니면서 낮술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았지만, 도지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애주가들이었다.
Waxy O'conner's Glasgow는 목재로 꾸며진 내부 장식들과 따뜻한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한 낭만적 분위기의 라이브 바였다. 주문을 하고 일층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이층 무대에서는 곱슬머리의 젊은 가수가 부드러운 기타 선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조용한 노래가 취향인 나와 남편은 오늘의 선곡이 마음에 들었다. 도지는 발라드 음악도 좋지만 펑크락이나 좀 더 리드미컬한 음악도 좋아한다고 했다.
"같이 음악 페스티벌에 가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도지는 내일부터 3일간 열리는 글래스고 외곽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갈 계획이었다. 우리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다음 행선지로의 일정이 잡혀 있어서 우린 아쉽게도 거절을 한 상태였다.
나중에 도지가 보내준 페스티벌 사진을 보니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뜻밖이었다. 뮤직 페스티벌이라기에 스피커를 통해 고막을 울리는 밴드 음악 소리와 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에서 떼창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사진 속 광경은 드넓은 초원 위에 참가자들이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서, 서로 모여 앉아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하며 한가로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이런 식의 페스티벌은 처음 보아서 굉장히 신선했다.
우리도 음악을 좋아는 하지만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소란한 공간이 연상되어서 썩 끌리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듣기도 하는 페스티벌이라면 나중에라도 한번 참가해 보고 싶었다.
라이브 공연 바 Waxy O'connor's Glasgow
맥주 못지않게 음악도 사랑하는 도지. 그의 집에는 여러 LP앨범과 LP판 플레이어, 피아노, 기타, 아코디언 등등이 있었다. 글래스고 나들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우리는 같이 올드팝을 들으며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불과 이틀 밤만 함께 지냈지만 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우릴 편하게 해 주었던 도지. 가끔 그와 함께한 글래스고에서의 하루를 떠올린다. 요즘엔 무슨 음악을 들으려나. 너무 과음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