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이유 없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리버풀의 응원가인 'You will never walk alone(당신은 결코 혼자 걸어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사가 주는 감동이 한몫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리버풀 도착
리버풀 주택가
리버풀에 온 것은 순전히 리버풀 스타디움 투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간만 맞으면 여행 예산을 깎아 먹더라도 경기 관람도 해보고 싶었는데, 하필 프리미어 리그 시즌이 막 끝난 시점에 여행을 가게 되어 스타디움 투어로 만족했다.
우리 호스텔은 리버풀 스타디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었는데, 골목마다 선수들의 생생한 벽화가 그려져 스타디움 입장도 전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스타디움 투어 시작!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스타디움 바깥부터 둘러보았다. 입구로 들어가면 리버풀 역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감독들 중 하나인 밥 페이즐리의 동상이 있다. 페이즐리가 부상당한 선수인 엠린 휴즈를 업고 나오는 모습을 조각하였다.You will never walk alone이라는 응원가에 부합하는 장면이기도 하기에 리버풀 구장 입구 가까운 곳에 설치한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스타디움의 다른 편으로 걸어가면 또 다른 리버풀의 전성기 감독이었던 빌 섕클리의 동상도 서 있다.
스타디움 내부로 들어가면 티켓과 함께 오디오 가이드를 하나씩 나눠준다. 오디오 가이드에 한국어 지원은 없었지만 영국인 가이드님이 직접 방문객들을 이끌고 스타디움 전구역을 돌며 설명을 해주신다. 본토억양이 강한 영국영어를 알아듣기 위해두 귀를 활짝 열고 들었다.
투어 초반에는 스타디움 관중석을 먼저 관람했다. 잔디로 가득 차야 할 구장인데 지금은 잔디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맨 흙바닥이 드러났다. 그래도 저 맞은편 붉은 객석에 보이는 흰색 L.F.C 글자를 배경으로 리버풀 구장 방문 인증샷을 남겼다.
리버풀 스타디움의 다른 이름인 안필드. 선수들은 경기에 입장하면서 'This is Anfield' 가 적힌 아래로 문을 지나게 된다. 각 선수들은 문을 나서며 Anfield 글자를 손으로 터치하고 지나간다고 한다.
남편이 안필드를 터치하는 사진을 찍어주는데 우리 뒤에서 다음 차례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꼬마아이가 있었다.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온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 들어 올려 줄까요?"
남편의 제안에 아이의 부모님은 고맙다며 부탁한다고 하셨다. 아이는 남편 손에 들려서 행복한 얼굴로 안필드에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구장 안으로 들어가면 머리 위로리버풀의 로고가 보인다. 상상의 새이며 리버풀 도시를 상징하는 새이기도 한 리버 버드(liver bird)가 들어간 로고이다. 텅 빈 관중석이지만 선수들이 입장하는 통로로 구장에 들어가니 머릿속에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착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며 유니폼을 갈아입는 공간에 들어가서는 방문객들이 너도 나도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과 사진을 찍느라 바빠졌다. 축구 천재 메시, 리버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무함마드 살라, 리버풀의 실력 있는 키퍼 알리송 베커, 야신이 좋아하는 로날도 등. 거의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 앞에 앉아 사진을 남겼다.
선수들의 라커룸에서 나오면 기자회견장이 있다.이곳에선 마치 선수가 된 기분으로 기자회견석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을 시간이 주어진다. 나와 남편도 오늘의 선수와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감독 느낌으로 사진을 찍어 봤다.
그렇게 투어를 모두 마쳤다. 항상 웃는 인상의 남편이지만 오늘따라 사진 속 남편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나도 축구를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지만 특별히 팬이라고 할 정도로 응원하는 팀은 없어서(손흥민 선수는 예외다!) 남편의 기분이 온전히 와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남편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한 구단의 팬으로서 그 구장에 직접 가보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투어를 마친 후 우리는 리버풀 중심가로 나가 오후의 산책을 했다.
안필드 스타디움에는 리버풀 팀을 이끌어 온 역대 감독들의 사진과 함께 업적이 적혀 있다. 여럿 뛰어난 감독님들이 있지만 가장 최근까지 감독을 맡았던 위르겐 클롭은 리버풀 팬들에게 아마 가장 깊은 감동을 안긴 인물들 중 하나일 것이다. 30년간 리그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던 리버풀 팀이 위르겐 클롭 감독의 지휘 아래 꿈에 그리던 우승 트로피를 다시 한번 거머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리버풀 거리에는 위르겐이라는 이름과 그의 사진이 자주 보이고 큰 길가의 어느 펍은 이름 자체가 위르겐이다.
마치 안필드 스타디움에 온 것과 같은 기분이 들도록 This is anfield로 문 위를 장식한 것이 창의적이다.
리버풀은 비틀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틀즈 멤버 네 사람이 걸어가는 동상이 서 있고 그 옆에는 'Let it be'를 부르며 버스킹을 하는 노신사가 계셨다. 흰 수염이 자라는 지긋한 나이에도 세월이 비켜간 가수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울려 나왔다. 비틀즈 동상과 사진을 찍고 난 사람들은 노랫소리에 이끌려 그 앞에서 긴 시간을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
저녁이 오고 있는 리버풀의 거리
그날은 우연히도 유럽컵의 잉글랜드-슬로바키아 경기가 있던 날이기도 했다. 맥주를 한잔 하러 들어간 펍에서 마침 방송을 틀어주고 있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맥주를 홀짝거리며 보다가 나왔다. 결과는 잉글랜드의 승리였다.
잉글랜드는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된 나라이기도하다. 그런 잉글랜드이지만 유럽컵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2024 유럽컵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를 보여줄까(결국 이번에도 스페인이 우승했다).
남편은 이날 숙소에 돌아가서도 한참 폰을 들여다보며 스타디움 투어에서 찍은 동영상과 사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태어나 처음 축구장 투어라는 걸 해봐서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무엇보다 남편이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스타디움 관람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경기까지 예매해서 봤더라면 아주 기절을 했겠구나 싶다. 언제가 되었든 리버풀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리그 경기일정에 맞춰 안필드의 객석에 남편을 깜짝 초대해 보고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