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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볼리비아- 라파즈

by 소울메이트

라파즈에는 쿠스코 만큼이나 다양한 액티비티가 있다. 그중 남편이 남미 땅에 닿기도 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액티비티가 바로 '죽음의 도로(데스로드) 자전거 주행'이었다.

스로드라니.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이 도로는 좁고 난간도 없는 비포장 산길, 과거에 차와 버스가 다니다가 이후 너무 위험천만하다는 이유로 통행을 중단시켰고 지금은 오로지 자전거로만 다닐 수 있는 곳이다. 아찔한 경험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남편에게 이 액티비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문제는 내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평지도 비틀대며 겨우 굴러가는 수준인 나의 실력으로는 죽음의 도로는커녕 '죽을 걱정 하나 없는 도로' 라도 달리기 힘들 터였다.


처음엔 '어찌 되든 부딪혀 볼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봤지만 내리막 커브길에서 브레이크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 쩔쩔매다가 낭떠러지로 직행하는 끔찍한 장면을 그려보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렇게 투어사에 부탁해서 남편은 자전거를 대여하고 나는 밴을 탄 채로 그 뒤만 따라가는 대신 비용을 덜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숙소에 돌아왔다.

근데 다 예약 해놓고도 막상 기분은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큰 편이었다. 어른이 되고 철이 들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옛날엔 남들이 할 수 있는 걸 나는 못할 때 그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데 나는 달리기에 소질이 있진 않았다. 달리기는 한 조에 다섯 명씩 묶어서 겨뤘는데 1등부터 3등까지만 손등에 참 잘했다는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도장 하나를 받고 싶어서 며칠을 연습해 결국 3등 도장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지금 이 우중충한 기분이 꼭 시절 달리기 3등 안에 들지 못해 텅 빈 손등으로 집에 돌아갈 때의 그것과 비슷했. 왜 나는 그 동안 흔하디 흔한 자전거 연습도 한번 하지 않았을까, 이제와서 애꿎은 지난날의 자신을 탓했다. 다가 쿠스코 여행 중에 만나뵈어 연락처를 주고 받았던 한국분들과 나눈 메시지 대화를 떠올리자 더 침울해지고 말았다. 두 분도 우리처럼 같이 여행하는 커플이셨는데 역시 라파즈에서 데스로드 액티비티를 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나는 자전거를 못 타 투어사 차에 타고 남편을 따라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윗하다며 위로를 해주셨다. 감사한 말씀이었고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심해에 던져진 바위처럼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나도 남편이랑 같이 자전거를 달리면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그 짜릿함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끝내 나는 바보처럼 또륵 또륵 눈물까지 흘려버렸다.

"나도 같이 타고 싶은데.. 따라가 봤자 같이 있지도 못하고 사진도 같이 못 찍잖아. 그럴거면 그냥 난 여기 있을래.."

남편은 그럴 수는 없다면서 나를 달랬다.

"그럼 나도 안 갈래. 같이 라파즈 시내에 있자."

"그건 싫어.. 데스로드 기대 많이 했잖아..그냥 혼자 다녀와.."

"아니야. 나는 같이 있는 게 더 중요해."

남편이 나를 따라 액티비티를 포기하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라파즈 시내에 나 혼자만 남아 있겠다고 한 것도 진심은 아니었다. 초부터 같이 안 갈 마음은 없었다. 땐 그저 서러워서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튀어 나왔을 뿐.


나는 눈물을 쏟다가도 나이 먹고 이런 걸로 우는 내가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엉덩이에 뿔이 나도 단단히 날 만큼. 남편도 그런 내가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간 퐁퐁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어찌됐건 같이 가자. 나도 사실 같이 가고 싶은데 아깐 너무 우울했어."

남편은 이 여행이 끝나면 나에게 자전거 특강을 해주기로 했다. 열심히 연습을 해서 자전거 고수가 되어 이 다음에 파즈에 다시 와서 그 땐 같이 데스로드를 달리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우린 데스로드가 시작되는 곳에 투어차량을 타고 도착했다. 인원은 여덟명, 나는 밴을 타고 뒤따를 거니까 데스로드를 달릴 사람은 일곱명이었다. 다들 장비를 착용하고 자전거를 체크할 동안 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했다.

"조심해서 달려. 특히 폰 들고 동영상 찍는다고 한손으로 운전 하기만 해봐. 아주 가만 안 둬!"

시작도 전부터 잔소리가 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남편을 아주 잘 안다. 내가 이렇게 신신당부를 해도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소용이 없었다. 나는 남편을 아주 잘 안다..


중간에 전망이 잘 보이는 바위에서 잠깐 멈춰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 때 남편이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찍지 말라고 했지!"

"하하, 근데 정말 안 위험해서 찍었어."

"으이구."

사실 지금 달리는 도로는 진짜 데스로드가 아니고 데스로드로 가는 길에 있는 포장도로이다. 내리막 경사가 있긴 하지만 길도 매끄럽고 크게 위험하진 않으니 봐주기로 했다.

"이따가 데스로드에서는 진짜 운전에만 중할 거지?"

"음.. 한 번 봐서?"

"뭐엇?!"

남편은 등짝을 맞으면서도 장난스럽게 웃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막상 진짜 주의해야 할 상황이 오면 선을 잘 지키는 남편이기에 걱정 않고 믿어보기로 했다.





사진을 다 찍고 다시 데스로드 향해 달려간다. 나는 밴의 조수석에 앉아 앞서가는 자전거 운전자들도 구경하고 바깥도 마음껏 구경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에 어제 울었던 게 색해졌다.






오히려 자전거를 탄 참가자들보다 밴을 타면서 여유롭게 구경한 내가 경치 감상은 제대로 한 것 같다. 데스로드 투어의 목적이 보는 게 전부가 아닌 스릴을 즐기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남편을 따라 나서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밴 안에서는 제일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는 참가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국에서 온 크리스티나라는 친구였는데 오는 길에 밴 안에서부터 긴장을 많이 하는 모습이었다. 같이 온 남자친구는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데 크리스티나는 좀처럼 속도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여섯명의 참가자들은 벌써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밴 안에서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표지판엔 '환영합니다' 라고 쓰여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환영인사..


아스팔트 도로에서의 비교적 쉬운 라이딩이 끝나고, 이제 본격 데스로드를 체험할 시간이다.

"여기서부턴 진짜 데스로드입니다. 돌길이고 좁아서 타기 많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여기 데스로드 입구 표지판이 있는 데서부터 주차장까지 자전거를 달려 보고, 아 이 정도는 괜찮다 하면 데스로드를 달리시면 됩니다. 하지만 아 이거 안되겠다 싶으면 시작하기 전에 바로 말씀하세요. 데스로드 중간에 울면서 나 못가겠다고 주저앉아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헬기도 못 불러요 여기는.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하니까 신중히 선택하세요."

이렇게 가이드님들이 주의를 주는데, 참여하지 않는 나조차도 긴장이 되었다. 날씨마저 안개가 껴서 더 스산한 분위기를 주었다. 남편과 다른 참가자들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 라이딩을 시작했다. 데스로드 표지판부터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차가 지날 수 있어서 나도 밴을 타고 자전거들을 따라갔다.

주차장부터 이어진 이 길이 돌이킬 수 없는 데스로드이다. 여기서부터 차는 지나갈 수 없다.


얼마 뒤 우리는 주차장에서 다 같이 멈춰 점심식사를 했다. 먹으면서 얘기를 해 보니 모두들 데스로드 라이딩을 하기로 결심한 듯 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크리스티나만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식사 후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여섯 명은 참가하기로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결국 뒤에 남기로 했다.

"저는 못 하겠어요. 여기까지 할게요.."

크리스티나의 남자친구는 축 쳐진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달래주었다.

이제 참가자들은 데스로드의 출발선에 한줄로 서서 기를 다진 뒤 곧 페달을 뗐다.

"파이팅!!"

나도 남편과 모두의 안전 귀환을 기원하며 응원의 파이팅을 외쳤다. 남편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망설임 하나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쩜 저렇게 거침이 없을까. 참 대단하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언젠간 나도 꼭 자전거를 정복하고 말리라.

멀어지는 남편의 등을 보며 '또 달리면서 동영상 찍어 오기만 해봐라.. 아주 경을 칠 것이야.' 하고 으로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저 멀리 산을 빙 두른 데스로드가 보인다.


또 찍었지. 또 찍었어.


타이어가 터져 고꾸라진 한 참가자의 자전거. 천만다행히도 다치진 않았다고 한다.


아찔한 절벽에서

투어가 끝나고 남편이 찍어온 사진과 동영상을 보았다.

"이거 봐! 또 달리면서 영상 찍었네."

"아냐 아냐. 처음에 찍어보려고 했는데 '어 이건 진짜 위험하다' 느낌이 딱 오더라고. 그래서 바로 핸드폰은 집어 넣고 운전에만 집중했어."

"아 그래서 동영상이 찍히다 만 것 같았구나. 그래 그래 잘했네. 안전제일!"

"맞아. 데스로드에서는 핸들을 두손이 얼얼하도록 힘껏 잡아도 중심잡기 어렵더라."

데스로드는 폭도 좁지만 온통 돌인데다 움푹진푹서 자전거를 컨트롤하기 매우 힘들고 엉덩뼈도 무지 아팠다고 했다. 달리는 내내 브레이크를 단단히 쥐고 있던 남편의 손바닥은 마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데스로드는 옛날에 차량 이동을 금지시키기 에는 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한 번은 버스가 절벽으로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고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겨우 수습했지만 까마득한 골짜기에 박혀버린 버스를 들어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금도 절벽 아래에 남아있는 하얀 버스의 잔해를 볼 수 있다.

데스로드에는 수많은 비석이 서 있기도 한데, 이는 바로 데스로드를 달리다 목숨을 잃은 분들의 묘비이다. 자전거 투어 중에 사망하는 사고는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두 명의 바이크 운전자들이 중심을 잃고 떨어져 변을 당한 적도 있고, 얼마 전엔 에콰도르에서 온 한 자전거 투어 참가자가 자전거에 고정한 고프로를 쳐 달다가 커브길을 보지 못해 추락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슬프고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데스로드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묘비들


끔찍했던 버스 사고의 흔적. 우측은 버스를 확대한 사진이다.


"이것 봐. 중간에 바위가 내려앉아서 길이 끊긴 곳도 있었어. 여기서는 자전거도 지나갈 수 없었어. 그래서 자전거를 세워 올려서 나무판자로 만들어 둔 다리를 건너갔어."

남편이 보여준 영상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바윗덩이가 주저앉아 거대한 도끼처럼 길 위를 찍어내린 게 보였다.

"어우 진짜 대단하다. 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멀리서 찍은 나무다리 사진. 쿵 내려앉은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나머지 바위들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생겼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모양으로 도착한 남편


아까 둘만 남겨진 밴에서 크리스티나와 여러 얘기를 했었다. 는 데스로드를 포기한 아쉬움에 눈물을 보이는 크리스티나를 달래며 어제의 일을 들려주었다.

"너무 마음 상하지 마. 나는 자전거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넌 일단 달리는 데 성공했잖아."

"그렇긴 해. 근데도 너무 속상해. 나만 뒤에 남겨진 기분이야.."

"나도 어제 똑같은 기분이 들어서 엄청 울었어. 남들처럼 자전거도 멋있게 타고 남편이랑 추억도 남기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까."

"그랬구나.."


그러고 한참 대화하던 중 남편과 남자친구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남자친구분이 되게 활발하고 의욕적이시던데."

"맞아. 데스로드 투어도 사실 나는 무서워서 오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설득해서 오게 되었어."

"그런 거였구나. 우리 남편도 너희 남자친구처럼 뭐든지 도전하는 거 좋아하고 위험도 즐기는 성격이야. 그에 비해 나는 겁을 내는 편이고."

"우리랑 정말 비슷하다."

"하하 정말. 근데 이렇게 반대라서 좋지 않아? 나는 남편을 만난 뒤로 그동안 해 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걸 경험할 기회가 많아졌거든."

"그래 맞아! 너도 그렇구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남자친구를 만난 뒤에 내 삶이 크게 바뀌었어. 난 남자친구가 정말 좋아.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어."

"와 잘됐다. 미리 축하해!"

"하하 고마워."


같은 방향으로 도는 톱니바퀴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반면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두 개는 부드럽게 맞물린다. 이처럼 너무도 다른 상대방에게서 배우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반자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오늘 어땠어? 기다리느라 지루하진 않았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물었다.

"좋았어. 산이 멋져서 좋은 사진도 많이 남기고. 어제 괜히 울었다 싶었어. 기다릴 땐 크리스티나랑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 괜찮았어."

"다행이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 다음에 자전거 배워서 꼭 다시 와서 같이 타자."

"그러자. 수영엔 젬병이었던 내가 신혼여행 중에 여보랑 같이 수영 못해서 속상했던 이후로 기를 쓰고 배웠잖아. 이번에는 자전거 차례야. 여행 끝나면 꼭 제대로 가르쳐 줘."

"물론이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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