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마추픽추
밴은 한치만 비껴나도 낭떠러지인 비포장 산길을 달려 마추픽추로 가는 중간지점인 하이드로일렉트리카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오늘 투어사의 역할은 여기까지. 이틀 뒤 같은 곳으로 투어사 밴이 우리를 데리러 나올 것이다. 그 사이의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었다. 여기서부터 3시간을 부지런히 걸으면 아구아스칼리엔떼, 바로 마추픽추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마을이 나온다.
아구아스칼리엔떼에 도보로 가는 길은 따로 있지 않다. 그냥 기찻길을 따라 걷는 거다. 열심히 걷다가 레일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면 남편과 장난 삼아 "뒤에 슬쩍 매달려 갈까?" 하고 진심이 조금은 섞인 농담을 주고 받았다. 비행기 시간이 걸린 일이 아니라면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여행하곤 했던 우리가 오늘만큼은 헛둘 헛둘 왼발 오른발 재빠르게 걷고 있다. 이게 모두 마추픽추 티켓을 위해서다. 현장구매로 원하는 티켓을 쟁취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우리 말고도 걸어서 가는 여행자들이 또 있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더니 은근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덕에 좀더 빨리 도착한 것도 있다. 걷는 중간 중간 '당신의 안전을 위해 레일 근처로 걷지 말라'는 주의 표지판이 보였다. 그에 아랑곳 않고 레일따라 줄지어 걸어가고 있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기차는 느린 속도로 달리고 저 멀리서부터 경적을 울려 접근을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레일 옆으로 걷는 게 크게 위험할 건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오후 2시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5시가 못 되어 아구아스칼리엔떼에 도착했다. 급한 마음에 숙소에 체크인도 하기 전에 마추픽추 매표소부터 찾았다. 숨을 몰아쉬며 매표소에 갔을 땐 이미 서킷 2 티켓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마추픽추 관람 경로는 서킷 1부터 3까지 세 가지가 있는데 경로마다 보이는 전망이 다르다. 서킷 1과 2는 비슷하지만 서킷 2가 조금 더 마추픽추를 예쁜 각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서킷 3은 마추픽추 가운데 서 있는 산의 꼭대기인 와이나픽추에 오르는 경로이다. 보통 서킷 2가 가장 인기가 많아 금방 매진된다. 과연 오늘 우리는 서킷 2 티켓을 구할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기도 한데 만약 안되면 뭐 서킷 1으로 가자는 생각으로 대기번호를 받았다. 우리의 대기번호 차례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서 숙소에 체크인을 먼저 했다.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매표소에 왔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자기 번호가 불리면 매표소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면 2층부터 1층까지 벽을 따라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보인다. 모니터에는 서킷별로 남은 티켓의 장 수가 표시되는데 서킷 2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서킷 2를 다 가져가버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
그렇게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창구의 직원분께 여권을 보여드리자 어느 서킷을 원하는지 물어보신다.
"서킷 2 아직 남아 있어요?"
"음... 오전 시간대는 다 매진이고.. 음.. 어디보자.. 오후 2시~3시 시간대만 몇표 남았네요."
"우왁!!!! 네네 그걸로 두 장 주세요!"
우린 너무 좋아 환호성을 질렀다. 직원분이 웃으며 티켓을 출력해 주셨다. 빠르게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운도 따라주었고 말이다.
다음 날 입장시간 2시간 전부터 마추픽추로 오르는 산행을 시작했다. 버스를 타면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버스비 인당 12달러가 작은 돈도 아니고 30분이나 걸린다고 해서 그럴거면 걷는 게 백번 나았다. 구글맵에서 버스 경로를 보니 산을 오르는 길이 S자도 아니고 아주 급한 곡선을 그리며 구불구불 마추픽추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등산로도 비슷할테고, 걸리는 시간은 버스로 30분이니까 걸어선 2시간 정도 잡으면 되겠거니 하고서 출발했다.
오르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등산로가 걷기 쉽게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경사는 조금 급했지만 숨이 별로 가쁘지 않았다. 와라즈에서 설산과 69호수 등반을 한 후로 고산환경에 적응이 되었나 보다. 그리고 마추픽추의 고도는 의외로 낮다.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도시 와라즈나 쿠스코와 달리 마추픽추는 2430m이다. 그래서인지 호흡하기가 편했다.
"응? 왜 벌써 다 왔지?"
두 시간을 예상하고 왔는데 한 시간도 안 되어 마추픽추 입구가 나왔다. 걸리는 시간이 버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대박이다. 이건 공유 해야겠다."
"그래. 브런치에 꼭 올려."
남편도 이렇게 쉽게 올라올 줄 몰랐다며 브런치를 통해 이 정보를 널리 알리라고 했다. 우리의 브런치페이지가 유명하진 않아 널리 알려질 지는 모르겠지만 헤헷. 아무튼 중요한 건 등산을 극히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버스에 큰 돈을 쓰며 오를 필요가 없다는 것!
자, 이제 두근대는 마음으로 마추픽추에 들어가 보자.
마추픽추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림 같았다' 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림 같다고 하면 보통 아주 아름다운 걸 볼 때 쓰는 말이니까. 근데 또 다른 의미로는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무쇠와 같은 바위를 갈고 닦아 이 높은 산꼭대기에 도시를 건설한 잉카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잉카 제국이 왜 하필 마추픽추에 도시를 지었는지 의문이 든다.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산 속 꼭대기에 지었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가사의로 불리는 만큼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로 저 큰 바위들을 어떻게 옮겼으며 자로 잰 듯 깎아 블럭처럼 서로 꼭 들어맞게 쌓아올렸는지, 가파른 산의 경사면에 계단식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도.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식민지시대 당시 마추픽추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피해 지금까지 그 모습이 보존될 수 있었지만,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그들의 유린을 피할 수 없었다. 쿠스코에서는 잉카인들이 지은 돌담 위에 스페인이 그들의 방식으로 지은 건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멕시코 메리다의 다섯 개의 피라미드를 헐고 그 자리에 성당을 지은 것처럼, 쿠스코에서도 잉카제국의 황금사원을 부수고 똑같은 짓을 했다.
마추픽추를 비롯하여 잉카제국의 건축물들은 지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한가. 이를 두 눈으로 보고도 원주민들을 야만인 취급했던 침략자들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저 땅과 재물만을 긁어모을 탐욕에 눈이 멀어 정작 누가 야만인인지를 보지 못했던가. 만약 스페인 침략자들이 마추픽추를 보았더라면, 그들 눈엔 그마저도 그저 깨부숴야 하는 의미 없는 돌덩이로 보였을까.
그리고 오늘날 모든 이들이 가보길 꿈꾸는 세계의 불가사의, 고도의 기술력으로 칭송받는 유적으로 남은 잉카제국의 유물을 그들이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 궁금할 따름이다.
마추픽추에서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에 산길이 공사로 막혀서 몇 시간을 밴 안에서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 쿠스코에 도착했다. 덜컹이는 차 안에 갇혀 있었더니 멀미도 났고 기운이 쏙 빠졌다. 하지만 다녀오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손꼽히게 특별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뿌듯함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큰 성취감을 주었다.
힘 있는 자들은 지혜와 자비가 없다. 현명하고 선한 이들은 정작 힘이 없다. 그러나 가진 것을 파괴당하고 빼앗기더라도 결국에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건 어리석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 속에 일군 지성과 문화라는 걸 보여준 마추픽추였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걷느라 힘들었던 몸을 쉬며 하루를 게으르게 보냈다. 커다란 액자처럼 광장이 담긴 창문 앞에서 커피도 마시고, 길거리 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소스를 듬뿍 뿌려 파시는 스파게티도 먹고, 아보카도가 절반은 들어간 듯 알찬 아보카도 치즈 샌드위치도 먹고,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구슬픈 길거리 공연도 감상했다.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맛있고 인정도 넘쳤던 페루. 쿠스코를 마지막으로 이 멋진 나라와의 작별이 다가왔다. 이제 볼리비아로 국경을 넘어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