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
되돌아보면 운이 좋았다. 다니는 동안 비행기가 지연된 적은 있어도 취소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랬던 우리에게 리마에서 일이 생겼다.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가 결항된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체크인 줄에 서 있던 승객들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르르 어느 곳으로 몰려갔다. 공항 뒤편의 작은 공간에 네다섯개의 카운터가 있었고 앞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줄의 거의 꽁다리에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오늘 비행기가 뜨기는 틀렸나보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영어에 귀 기울이자 '투데이 노 플라이트' 라고 분명 들렸다. 기다림에 지친데다 일정까지 틀어져버린 승객들의 원성이 점차 높아졌다.
결항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른 비행기들은 잘 떴던 걸 보면 기상 문제는 아니었고 아마 항공기 결함이었을 거다. 그렇다는 건, 하바나행 비행기에서 악천후로 고어라운드를 했을 때 자메이카 공항에서 노숙했던 것(그땐 목숨이 달렸던지라 노숙이고 뭐고 그저 무사히 하바나에 내려주신 기장님께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과 달리 이번엔 항공사에서 숙박을 책임져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고개를 쭉 빼고 먼저 카운터에서 상담 받고 있는 승객들을 보니 항공사로부터 뭔가를 받아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옳거니, 저것이 숙박 예약 확인서 같은 건가 보다.
승객별로 걸리는 시간이 길어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 우리 차례가 왔다. 우린 당일에 쿠스코에 환불과 날짜변경이 안되는 조건으로 이미 호스텔을 예약해 둔 게 있었기에 그걸 먼저 해결해야 했다. 설명을 들은 항공사는 결항에 대해 증명하는 서류를 주었다. 나중에 쿠스코에 도착하여 호스텔에 이 서류를 보여주고 숙박 일정을 변경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결항으로 인해 차질이 생긴 일정은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호스텔 문제가 해결되자 직원분께서 금일과 익일 일정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여기 종이에 적힌 호텔에서 오늘 숙박하실 거고요, 식사는 오늘 저녁, 내일 아침과 점심까지 제공됩니다. 내일 점심식사 후에 비행기 탑승시간 2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와 주세요. 오늘 호텔로 가실 때와 내일 공항으로 돌아오실 때 모두 저희가 제공해드리는 공항택시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호오.. 숙소, 식사, 그리고 택시 픽업까지 제공된다고 한다. 상담 전에는 언성을 높이던 승객들이 나갈 때는 진정된 모습이었던 이유가 이래서였군.
모든 종이를 받아 공항 출구쪽으로 나오니 항공사에서 말해 준 택시회사 창구가 있었다. 창구에서 종이를 보여주자 곧바로 택시 기사님이 배정되었다. 기사님께선 우리를 택시가 있는 밖으로 안내해주셨다.
"오오.."
거기엔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검정색 SUV가 빤딱빤딱 광을 내며 서 있었다. 기사님은 우아한 몸짓으로 우리의 꼬질꼬질한 배낭을 받아 트렁크에 사뿐히 실어 주시고는 차 문까지 열어주셨다.
"가.. 감사합니다아.."
이거 뭔가 분에 넘치게 받고 있는 기분인걸.
"차는 편안하신가요? 에어컨도 적당하고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호텔까지는 한 시간 걸립니다."
앗.. 너무 상냥하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무엇보다 한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택시로 달려본 적이 있던가. 애초에 공항택시는 비싸서 잘 타지도 않는데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반신반의 했는데 정말로 한 시간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깨끗한 거리, 고급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모여있는 구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와라즈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도착한 리마 터미널 주변은 도로에 쓰레기가 날리고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같은 리마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았다. 또한 리마는 남미에서도 치안이 나쁘기로 손에 꼽히는데 여기서는 밤늦은 시간 공원에서 아이들끼리 농구를 하고 있을 정도로 동네가 안전해보였다. 우리는 어리둥절하여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택시를 타고 올 때만 해도 호텔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이용한 항공사는 저가 오브 저가 항공사였기에 최소한의 구색만 갖춘 숙소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근데 로비부터 너무..
"여기 너무 좋아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이런 건 생각 못 했는데."
"헉. 여기 봐봐. 별이 네개..!"
그랬다. 초절약 여행을 하던 우리에게 별 달린 호텔은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었는데. 무려 4성급 호텔이라니.
"항공사에서 대체 돈을 얼마나 썼을까?"
"그 많은 승객에게 전부 이렇게 해주려면 이번 결항으로 손해를 엄청 봤겠는걸."
비행 한번에 항공권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 할테지만 이렇게 한번씩 문제가 생기면 깨지는 돈도 만만치 않겠다.
아무튼 결항 덕분(?)에 항공권의 몇 배는 비싼 1박을 하게 되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들어간 방은 우리 기준에서 정말 호화로웠다. 그동안 카우치서핑을 이용할 때를 빼고는 항상 침대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는 공간에서 자거나 도미토리에서 자곤 했더니 걸어다닐 공간이 이토록 넓은 방이 낯설기만 했다. 침대는 또 얼마나 폭신하고 티끌하나 없는지. 이 침대에서면 반나절을 잠만 잘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도 공용 화장실만 거의 쓰다가 전용 화장실을 쓰니 이리도 편할 수가 없었다. 아, 오늘은 그간에 우리도 모르게 지쳤던 몸을 하루 푹 쉬라고 하늘이 주신 선물인걸까.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올라가자 먼저 온 다른 승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식당의 매니저님으로 보이는 분이 오시더니 메뉴를 설명해주신다.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음료로 구성된 식사였다. 디저트는 없었지만 우린 이미 감동 받고 있었다. 아침 공복에 물 한잔이 애피타이저요, 메인요리라 하면 빵 하나에 커피 한잔으로 때울 때도 있었는데. 그리고 음료란 특별한 날에만 한잔을 시켜 둘이서 나눠 마시던 귀한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 간만에 위장까지 호강을 하는구나.
다음 날엔 아침에 눈 떠서 체크아웃 전까지 먹고 또 먹기만 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오후 1시여서 아침식사를 마친지 두 시간 뒤에 바로 이어 점심까지 먹으려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식체를 하더라도 공짜로 주어진 질좋은 식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아침이 덜 꺼진 상태로 점심까지 야무지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기다리는 동안 우린 꿈 같았던 지난 하루를 곱씹었다.
"비행편이 취소되는 게 뭐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아, 안 그래?"
"맞아. 덕분에 잘 쉬었네. 그래서인지 나 오늘 컨디션 무지 좋아. 몸이 이렇게 가벼운 건 오랜만이야."
"나도 나도! 잠자리가 중요하긴 하구나."
한눈에 봐도 하루 새에 둘 다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결항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잃어버린 건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론 금쪽같은 하루를 얻은 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우린 비행기를 타기 전 탑승게이트를 확인할 때마다 이런 습관이 생겼다.
"우리 비행기 찾았어?"
"응, 저기 있다. 게이트 OO번이래."
"그래? 혹시 취소됐어?"
"하하, 아니 아니 오늘은 아니네."
"아 응.. 그래. 가자."
"뭐야 하하하, 아쉬워?"
"응 쪼오끔? 하핫 농담이야. 얼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