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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푸른 보석 69호수

페루- 와라즈

by 소울메이트

설산 등반 후, 투어사의 밴을 타고 라즈 시내에 돌아오자마자 우린 투어사로 다시 달려갔다.

"저희 내일 69호수 투어 예약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전 4시에 버스가 숙소 앞으로 픽업하러 갈 거니까 준비해 주세요~"

"네에!? 또 4시예요? 힝 더 자고 싶은데.."

"호호호, 네에 '4시'에 맞춰서 버스 타셔야 합니다~"

"넹.."

그렇게 연이은 등산 투어를 질러버렸다.

투어사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허벅지를 관통하는 근육통에 윽 소리가 절로 나온다.

"윽! 악!"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어기적 어기적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 괜찮겠지..?


69호수 트레킹 지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다음 날. 투어사 버스에 무사히 시간 맞춰 올라탔다. 어제는 작은 밴에 소수의 인원이 탔는데 이번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큰 버스에 타고 갔다. 가이드님도 두 분 밖에 안 계셨다. 69호수 트레킹은 장비도 필요 없고 눈에 미끄러져 다칠 일도 없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무엇보다 웃음기 하나 없이 이글거리는 교관의 눈빛을 장착한 Mr.스파르타 가이드와 달리 오늘의 가이드님들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휴 다행이다. 오늘은 조금 설렁설렁 가도 되겠지.

69호수 가는 길에 있던 또 다른 호수에 잠시 멈춰 다들 사진을 찍었다.


오늘 갈 호수의 이름이 왜 69호수인고 하니, 이 산에는 수많은 호수들이 있어 각각 번호를 붙여 구별해 두었는데 그중 69번째 호수여서라고 한다. 그 많은 호수들 중 69호수가 특히 아름답다 하여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다.


버스가 멈추고 드디어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69호수로 가는 산길의 특징은 첫 2시간가량은 평지에 가까워 난이도가 낮다가, 후반 1시간의 경사진 구간에서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산책하듯이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걸었다.

트레킹의 시작


큰 뿔을 가진 외모와 다르게 매우 순한 소


아이슬란드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


올라갈 때 3시간, 내려올 때 2시간. 총 5시간의 짧지 않은 트레킹인데도 가는 길이 아름다우니 전혀 지루하지 않다. 손때가 타지 않아 깨끗하기 그지없는 초원 위로 커브를 그리며 힘차게 달리는 개울의 시원한 랫소리가 흐른다. 덩치는 크지만 순하디 순한 눈망울의 소들은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제 무게에 못 이겨 산 등성이 위로 쏟아져 내 구름 풍경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얼마 전 여행했던 여름의 아이슬란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빙하가 녹아서 생긴 실폭포도 중간 중간 보인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가슴 한가운데 통증이 있었다. 급경사를 걷는 것도 아니고 숨이 그다지 찬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프지? 흉골 가운데 아픈 곳에 살짝 손을 대어 보았다. 심장이 말 그대로 발딱발딱 뛰고 있었고 통증은 그 박동에 맞추어 생겨나고 있었다. 아, 이것 때문인가 보다.

어제 설산을 탈 때 난생처음 경험하는 거센 심장박동을 느꼈다. 등반에 집중하느라 나중엔 심장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산을 타는 내내 심장은 생전 처음 겪는 강도의 노동을 견디며 쉴 새 없이 펌프질을 해댔던 것이다. 얼마나 세게 뛰었으면 그 앞 뼈까지 아플 정도인가 싶어 심장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심장아.. 오늘 하루만 더 고생해 주라.

갑자기 비가 내렸다.


페루에서 등산을 할 땐 날씨가 변화무쌍하여 비옷을 챙겨가는 게 좋다. 리고 우린 그걸 몰라 비옷을 가져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에 젖었다 말랐다 하며 단련이 되었는지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생했던 날들이 오늘에 와서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보람이 있고만. 하지만 다음부턴 비옷을 챙겨야겠다..

가는 길에 보이는 작은 호수


마지막 1시간은 듣던대로 정말 어려웠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이 계속되었는데 길이 온통 자갈이라 디딜 때 돌들이 구르면서 발을 자꾸 미끄러트려 더 힘들었다. 시작할 때 쉼없이 재잘대던 우리도 이 구간에선 둘 다 헉헉대느라 말을 잃었다. 그렇게 얼마나 행길을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호수에 도달한 사람들이 보였다.

"다 왔다! 드디어!"

만나서 반갑구나 69호수







해발 4604m에 자리한 푸른 보석과도 같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걸 보기 위해서라면 더 힘든 산행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나 맑은지 얕은 수심에선 바닥이 그대로 보였고 수심이 깊은 곳은 누가 물감이라도 풀어 놓은 듯 푸르렀다. 보통 맑은 물을 보면 뛰어들고 싶어지는데, 69호수는 혹여 때라도 묻을까 아니면 흙탕물이라도 일까 싶어 새끼손가락 하나 담그기도 미안했다. 그 모습 그대로 망가지지 않고 영원히 아름기를 바라 마음에.




점심 먹다가 흘린 참치 조각을 새 한마리가 먹으러 왔다.



하산길



트레킹 마치고 돌아가는 길 버스 창을 통해 보이는 설산


돌아가는 길도 장관이다.


오늘도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근육통이 있는 상태로 또 산을 탈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는데 막상 해보니 오히려 움직이면서 근육이 풀어지는 효과를 보아서 쉬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어찌보면 숨이 가빠서 몸 아픈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안데스산맥의 직한 선과 웅장한 산세에 감탄하느라 힘든 걸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리나라 산들이 자랑하는 세하고 수려한 이미지와는 또 다른 매력 뽐낸다.


뜬금없이 이런 상상이 든다. 69호수가 우리나라로 옮겨진다면? 워낙 등산에 진심인 우리나라 사람들이기에 아마 이른 새벽부터 등산을 나온 동네 사람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반대로 지리산이 와라즈의 안데스 산줄기에 옮겨진다면 어떨까? 일단 지리산 꼭대기는 일년 내내 눈으로 뒤덮일 거고 일주코스는 안데스 산맥 일명 '죽음의 문턱 밟기' 코스로 꼽히게 될 거다. 주를 하는 데에도 1박 가지고는 어렵고 최소 2~3박은 해야 하지 않을까.

쓰고 보니 더 생뚱맞다.

볼수록 인형 같고 귀여운 전통의상


고산지대에서의 등산은 근지구력보다 심폐지구력이 관건이라 할 수 있겠다. 대기 자체에 산소가 부족하니 그에 맞춰 심폐기능을 적응시키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우리나라에서 지형도 더 험하고 더 장거리인 산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와라즈에서의 산행이 더 힘들었던 이유다. 와라즈에서 이렇게 단련한 덕에 이후에 고산이 아닌 곳에서 등산을 할 때는 숨 쉬기가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멋진 설경과 호수도 감상하면서 체력도 길렀던 일석이조의 시간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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