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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 시 작 Apr 03. 2024

할머니와 냉이

-  청량리 이야기 2 -

차곡차곡 일상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우산 있어? 데리러 갈까?"

"아냐~ 우산은 편의점에서 사면 되고 버스는 자주 오니 노 프라블럼"

호기롭게 말은 했으나 내심 와주길 바랐는데 그럼 조심해서 오란다. 끊자마자 후회했다.

자주 오는 곳도 아니고 어둠까지 더해져 주변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늘 눈에 띄는 편의점 간판도 그날따라 보이지 않고.


10분 남짓 걸어 나와 드디어 예스럽고 심플한 비닐우산을 샀다. 우산 등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탱탱 튀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비닐우산의 정취에 젖어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가판에서 냉이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봤다. 우산도 없이 남은 채소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냉이와 감자 고구마 호박 등. 각각의 바구니 앞에 골판지에 거칠게 쓴 가격표가 반쯤 젖어 있었다.


순간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냉이를 무진장 좋아하는.

냉이도 사고 고구마도 사고 호박도 샀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 할머니의 가판은 가격이 참 따스웠다. 전부 해서 7천 원이란다. 검은 비닐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채소들을 보며 한껏 뿌듯했는데...


돈이 없다. 카드지갑에 카드만 한 장 덩그러니 있었으므로. 그래도 괜찮다. 계좌이체 하면 되니. 근데 계좌번호를 잘 모르신단다. 음 어쩌지~ 이미 포장까지 다 끝난 상태이고 비도 계속 내리고 할머니도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 쉬셨으면 좋겠고.


"할머니 근처 은행이 어디에 있어요?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요."

"그래? 저기 사거리 쪽에 있을 걸. 잘 몰라. 비도 오고 하니 그럼 다음에 지나갈 때 돈 내" 라 말씀하신다.


아이구~그건 아니죠 어르신. 죄송한데 잠깐 기다려달라 말씀드리고 한참을 걸어 아까 비닐우산 샀던 그 편의점으로 가서 돈을 찾았다. 다시 돌아오니 아직도 정리를 하고 계셨다. 아이 다루듯이 천천히 한 바구니씩. 채소값을 내는데 할머니 한 말씀 덧붙이신다.

"다음에 줘도 되는데.. 비 오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이 냉이 더 가져가"라고.


돈도 없이 무턱내고 채소를 고른 건 나고 그래서 죄송한 것도 나인데 할머니는 되레 늦은 시간 비도 오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신다. 심지어 다음에 지나갈 때 돈 내라고까지 하시니. 사람을 믿고 배려하시는 이 분의 삶의 철학이 엿보인다. 요즘 같은 시대 왜 손해 보는 일을 하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으나 할머니는 장사 이전에 그게 사람 사는 정이라 느끼시는 것 같다.


"비 오는 금요일 밤 이 귀한 냉이를 덤으로 더 주셔서~ 돈 찾아올 동안 기다려주셔서~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믿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몇 번이나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의 굽은 허리 안엔 얼마나 많은 인생의 굴곡과 얼마나 깊은 삶의 지혜가 녹아있을까~




그날 사 온 냉이와 고구마가 하도 맛있어 이번 주에 또 가려 한다. 할머닌 금요일 밤 빗속에서 채소들을 사 간 나를 기억하실까? 기억 못 하셔도 상관없다. 이미 내 맘속엔 그 어르신이 저장되어 있으니까.


이승윤가수를 영화관에서 만나고 할머니를 가판에서 알게 된 청량리. 그 도킹의 기억이 나에겐 따뜻하고 선명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 오늘의 단어는

할머니 おばあさん(오바~사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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