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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 시 작 May 21. 2024

그날 C와 먹은 부대찌개 나에겐 추억이자 현실

- 부부란 -

차곡차곡 추억


1994년 6월의 어느 토요일 수원, C를 따라 들어간 허름한 부대찌개 집에서 난 10명가량 되는 남자들의 형수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형수님 환영합니다. 우리 형, 내 친구 잘 좀 부탁해요"  

이들은 C의 대학원 동기이자 후배였다. 후배라 해도 나보다 한 두 살씩은 많았고 막내로 자란지라 누나, 언니, 형수 같은 호칭은 마냥 낯설기만 했던 때였다. 게다가 C어떻게 소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낼모레 결혼할 같은 분위기로 몰아가는데 살짝 진땀이 났다.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던 걸 보면 나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분이 계셨으니 주인 할머니였다. 여자친구 데려왔으니 특별히 많이 준다는 말씀에 그제서야 내 눈이 냄비로 향했다.


정말 다른 재료 없이 햄과 쑥갓만이 수북이 쌓여 있더라. 근데 이 집은 규칙이 있었다. 절대 부대찌개 냄비에 손을 대선 안 되고 주인장이 살살 고추장을 풀어 재료를 섞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기한 건 어느 누구도 토 다는 이 없이  배고픈 미소만 띠고 기다린다는 거였다. 오랜 시간 쌓아온 할머니와 학생들의 신뢰와 믿음이 보글보글 끓어오른 순간. "먹어"라는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재빠르게 쑥갓을 반쯤 건져먹고 라면사리를 넣었다. 치즈와 야채, 통조림콩 등이 빠진 얼큰한 찌개와 달달한 무생채 그리고 통통한 콩나물 무침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다음 해 난 C와 결혼했고 10명의 시동생들은 가끔 만나기도 하나, 칼칼하고 담백한 그 고추장 부대찌개는 그날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아이의 학업이 끝나자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편은  나 혼자 밥 먹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일찍 퇴근한다. 가끔은 혼자 먹게 하는 것도 예의인데 아무래도 센스(?)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밥상에서 머리를 맞대고 여행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가끔 가는 긴 여행보다 자주 가는 짧은 여행(1박 2일)을 하기로 말이다.  강원도는 많이 갔으니 우선 충청도부터 시작하자. 그래서 지난번엔 충주를 다녀왔다. 이번엔~


지난주 금요일 3시 남편 회사 앞으로 갔다. (남편 회사는 금요일은 3시에 퇴근이다. 가정의 날이기에) 마침 아이도 시간이 맞아 같이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지는 천안과 아산이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시장 구석구석을 돌았고, 지중해 마을에 가서 유럽의 분위기를 느꼈다. 사실 유럽은 가 본 적 없어 그냥 상상의 분위기를 자아낼 뿐이었지만. 한참을 돌아다니다 한울마을이란 곳에 다달았고 근사한 카페에서 커피의 향과 맛에 취해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수원에 들렀다 가잖다.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으므로. 이래서 부부인가?!




코끝에 전해지는 살랑한 봄바람과 함께 수원으로 향했다. 근 30년 만에 닿은 수원은 그때와 많이도 달라 있었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알듯 말듯한 기억이 스쳤다. 찾았다 드디어! 할머니 부대찌개.

그땐 허름한 판잣집이었는데  지금은 2층 집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땐 터프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며느님이 계셨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투박한 부대찌개의 모습과 능숙한 손놀림, 달달한 무생채와 통통한 콩나물 무침 그리고 30년 전 그대로의 맛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간 흔적을 남기며 같은 자리를 지켜낸 그 찌개집에 이런저런 힘든 시간을 거쳐 살아온 우리 부부가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20대의 젊은이 둘이 50대의 중년이 되어. 변하지 않은 그때의 찌개 맛처럼 변하지 않은 그때의 C가 바로 내 옆에 앉아 밥을 먹고 있음에 그리고 그를 닮은 C'가 있음에 그저 감사한 어느 봄날의 여행이었다.


* 오늘의 단어는

부부 ふうふ(후~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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