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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새결 Nov 20. 2024

그림자: 밝은 어둠과 어두운 빛 사이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 TACET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사상을 기반으로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한 비트겐슈타인은 출판사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이 책에 담겨 있지 않다고. 그래서였을까. <작별하지 않는다>를 명확한 노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한번 탄생한 그림자에 다시 빛을 비출 수 있다면 이런 그림자가 생길까. 이어 붙인 자국도, 뚜렷한 방향 전환도 모호한 한 편의 시를 읽은 기분이다. 고요히 눈을 감은 시선은 훼손되면서 새로이 쓰이는 의미를 따라간다. 검은 나무 사이로 밀려드는 바다를, 구름 사이로 빛이 비치면 날아다니는 깃털 같은 새들을, 혹은 눈송이를.




https://youtu.be/JTEFKFiXSx4?feature=shared

존 케이지, <4분 33초>
1악장: TACET
2악장: TACET
3악장: TACET




그림자만큼 커진 통나무에 먹을 입힌다, 벽에 연필로 윤곽을 따라 그린다, 눈 속 무덤을 손으로 파헤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1부 새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처음 그 검은 나무들의 꿈을 꾸고 일어나, 두 눈 위로 차가운 손바닥을 덮고 누워 있던 그 밤이 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 광경에 마음이 쓰여 그해 가을 생각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통나무들을 심을 수 있지 않을까. ... 깊은 밤으로 지은 옷을 입히듯 정성스럽게, 영원히 잠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공방에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내벽의 사면에 기대서 있는 서른 그루 남짓한 통나무들이다. … 대체로 이 미터의 키를 훌쩍 넘겨, 내 몸집과 비슷한 몇몇 나무들은 비례상 열두 살 전후의 아이들처럼 보인다.
내가 꿈에서 본 검은 나무들은 등신대의 크기였다고 인선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왜 비례를 키운 걸까?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벽 위로 저 그림자가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인터뷰이가 방금 뱉은 말을 부인하며 내젓는 팔 같은, 힘껏 내밀었다가 돌연히 거두는 손길 같은 일렁임이 인터뷰의 흐름에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넣었다.


2부 밤
제목이 뭐야? ...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날아오르려는 것인지 내려앉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서까래와 마루 사이에 영원히 갇힌 듯 퍼덕이는 그림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등신대의 두 배에 가까운 인선의 그림자가 천장의 흰 벽지 위로 일렁이며 다가온다.
초를 들지 않은 손으로 바랜 벽지를 쓸어나가 인선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얹어본다. ... 사라진 그림자에게만 물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
… 내가 그리고 있는 윤곽선 바깥으로 다른 선을 발견했다. 작년 가을 내가 그어놓은 연필 선이었다. ... 날이 밝은 뒤 이 벽을 본다면 교차되고 겹쳐진 선들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눈 속 무덤을 내 손으로 파헤쳤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삭은 뼈들을 내가 삽으로 부수고 손갈퀴로 흐트러뜨렸는지도 모른다.


3부 불꽃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https://youtu.be/b51a17yi8VY?feature=shared

디어클라우드, <내가 잠에 들면 깨우지 마세요>


새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다고 인선은 말했다.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새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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