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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파 Dec 15. 2023

RED #3 크리스마스

레드로 (  )을 말하다. 그리고 그리다.

세상이 온통 빨갛다. 광택감이 강한 오너먼트와 타오르는 벽난로, 추워서 불그스름해진 뺨과 손가락이 가득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캐럴은 사랑으로 만들어 뜨겁게 달군 마시멜로 같다. 지독하게 달콤하고 뜨끈하게 마음을 녹인다. 이 시기엔 9년 전 뉴욕에 있을 때가 떠오른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애써 무시하며 전광판 사이를 걷고 있을 때 불현듯 공원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졌다. 어떤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었을 테다. 바로 브라이언 파크에 가서 스케이트 끈을 단단히 묶으며 생각했다.


‘손을 잡으며 뒤뚱대는 연인들을 모두 지나치겠어.’


빙상엔 모두가 정신없이 한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스며드는 승용차처럼 적당한 타이밍에 인간 소용돌이의 바깥쪽 곡면에 안착했다. 그리고 점점 속도를 높였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코끝이 차갑다 못해 어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게 자유지.

나는 뉴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멋진 사람이다!’


양팔을 타이타닉처럼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에 대차게 넘어졌다. 무릎으로 바닥을 찧으며 엄청난 소리가 났다. 넘어진 동시에 번쩍 일어나 빠르게 달렸다. 몇십 바퀴는 더 돌아야 사람들 머리에서 잊힐 것 같아서 달리고 또 달렸다. 눈가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작정하고 홀리데이 시즌에 영화적인 모멘트를 구현해도 삶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도 비슷하지 않나. 빨강이 넘치는 풍요의 시즌이지만 가장 춥고 앙상한 겨울에 자리하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나이를 먹고 책임질 게 많아질 뿐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는 걸 어떡하나. 대차게 넘어졌던 기억 같은 걸 갖고서도 잘만 살아간다. 삶에 고통과 쪽팔림이 가득한데도 살아가는 건 시간이 흐르면 이런 기억이 추억으로 포장되기 때문 아니겠냐고. 올해는 어떤 빨간 추억이 기다릴까?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든, 사랑에 겨워 달아오르든, 어떠한 빨강이든.


아, 크리스마스가 곧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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