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무중구(無重區)의 바닥

모든 것이 사라진 고요한 심연 속으로

by ASTER

빛은 끝나지 않았다.

해인은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발은 땅을 딛지 않았고,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이게 꿈이면, 너무 현실 같고

현실이면, 너무 조용하다.'


해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입을 떠나는 순간 바로 사라졌다.

소리가 증발했다.

의미는 공기 속에 스며들지도 못한 채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그녀는 주저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앉았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곳엔 무언가로부터 누르는 힘,

‘아래’가 없었다.


무중구(無重區).


어디서부터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그 단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게도 없고, 바닥도 없는 곳.”

그제야 깨달았다.

여긴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마음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기분.


이곳은

압력도 없고, 온도도 없고, 언어도 없는 세계.

오직,

감정만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시간조차 없었다.

시간이 끊임없이 흐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알고 있던,

그녀가 살고 있던 세계에서만 느끼던 것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으니까.

보고서도, 생산지수도, 오늘의 실적도.

지켜야 할 행동 수칙과 표정, 말투도.

심지어 ‘나’라는 존재조차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편안함은 곧 불안으로 번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일까? 이 느낌들은 무엇일까’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없고,

공간이 없으니 경계도 사라졌으며,

말이 없으니 자신의 생각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지.'

그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순간의 침묵을 삼켰다.

심장이 쿵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

그 뒤로는, 고요.

그 고요함이 오히려 무서웠다.

너무 고요해서,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들이 모두 흐려졌다.

자신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해인은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반사작용이자,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붙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품 안에서도,

결국은 자신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주 미세한, 진동 같은 파동이 공기 속에서 퍼졌다.

형체도 없고, 방향도 없었지만

분명히 다가오는 ‘의도’가 있었다.

해인은 느꼈다.

그건 그냥 '말'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가 아닌 감정이었다.

귀로 들린다기보다 저 너머에서부터 뼛 속까지 전달되는 진동이었다.

그 물음은 너무 깊고 깊어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나는…… 윤해인입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며 울었다.

소리도 없고, 눈물도 없는데

분명히 울고 있었다.

감정으로

그녀가 내면이라고 믿는 것으로


그 때, 무중구의 색이 바뀌었다.

회색으로 멈춰있던 공간이

조용히, 아주 천천히

빛의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부터 번져오는 작은 빛들이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 중심에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형체가 떠올랐다.

나선처럼 둥글고 환한 파문.

해인이 벽 틈으로 처음 보았던 ‘그것’.

그녀는 본능처럼 다가갔다.

이번엔 손이 보였다.

돌아왔다. 그녀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해인은 그 파문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 공간은 숨을 쉬듯 떨렸고,

그녀의 마음 어딘가도 같이 움직였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이 무중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가장 깊은 방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음 공간은,

그 방에 감춰진 기억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걸.


[다음 화 예고]

제3화. 파문도서관_기억의 파편들,

그리고 잊힌 감정의 첫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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