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감정의 첫 단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공간도, 색도, 온기도 없이
단지 ‘존재한다는 감각’만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계속 '흘렀다'
물도 아니고, 공기도 아닌 감각.
그것은 해인의 가슴속에서
울림처럼 시작되었다.
빛도, 소리도 없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차곡하게 서가에 꽂힌 듯한 형상들.
오랜 기억을 담고 있는 듯 가지런한.
여기는 도서관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검은 점들이 반짝이는 화면들,
커피 향 너머 하얗게 빛나는 묵직한 서류뭉치.
엉킨 전선들과 기계음 사이로 들리는
누군가의 얕은 숨소리.
해인이 파문을 응시하는 순간,
무겁고 끈끈한 덩어리가 되어 소용돌이쳤다.
해인은 그것들을 피해 출구를 찾았지만
사방은 단단하게 막힌 벽이었고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어디서 들린 거지?
누구의 목소리지?
아니, 정확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언어라고 하기엔 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가슴 어딘가 있다고 믿어지는 내부에서 솟아 나온 울림이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퍼지는-
내 것이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던
늘 찾고 있다고 믿어 왔던 것
그때, 공간이 다시 일렁거렸다.
해인의 눈앞에서 그 파문이 뒤틀리고,
중심으로부터 ‘작은 해인’이 떠올랐다.
눈, 코, 입,
얼굴이나 몸의 형체는 없었지만
해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건 분명히 해인의 '감정'이었다.
작은 해인은 조용히,
해인을 통과해 지나쳐 갔다.
해인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발자국이 지나는 자리마다 공간이 바뀌었다.
도서관의 바닥은 사무실의 바닥이 되고,
어느새 공기엔 단단한 침묵이 스몄다.
벽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기억은 다시 형태가 되어 살아났다.
언어가 아니라, 공간으로.
감각의 재현으로.
감정의 울림으로.
작은 해인은 서가도 아니고 바닥도 아닌,
공중의 빛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해인을 보지 않은 채 속삭였다.
“고통과 좌절.. 회피는 기억을 왜곡해.
이건 내가 아니야. 내 진짜 기억이 아니야.
감추고 피하려고 숨겨둔 감정들이야.”
해인은 그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공간이 무너졌다.
벽장과 서가가 일순간 사라지고
작은 해인이 사라졌다.
바닥이 사라졌고,
사방을 채운 공기와 벽도 사라졌다.
대신 미세한 점자들이 빛처럼 쏟아졌다.
공중에서.
그건 잃어버린 언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뱉어 본 적 없는.
말이나 기록이 아닌, 깊이 새겨진 감정의 파문과 파동.
해인은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들이
언어보다 오래된 존재로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감정을 인정하고 알아본 순간,
파동의 한가운데
빛의 나선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동 너머에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빛을 ‘해독’하는 존재.
감정의 감시자.
그것이 해인이 만나게 될 다음 문이었다.
[다음 화 예고]
제4화. 시엔의 그림자 - 기억이 움직일 때, 감시자는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