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누가 그것을 설계하는가
기억의 수족관,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균열기억의 수족관,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균열
그 문 너머에서, 시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해인은 무언가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공간은 분명히 '실내'였지만,
어떤 살아있는 짐승의 심장 속 같았다.
천장과 벽은 유기적으로 흐르며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바닥은 깊은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곳은 '감정으로 지어진 방' 같았다.
그리고 정중앙에 그림자가 바람도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환영한다, E-47
그 음성은 어딘지 낮고 서늘했지만,
이상하게도 해인의 가슴 어딘가에 와닿았다.
“그 이름, 부르지 마.”
해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내가 아냐.”
“그래, 정확히는 네모라 안에서 네가 가진 감정의 코드명이지.”
시엔은 다가오지도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우린 네 이름을 뺏은 적 없어.
이 모든 건 네가 선택한 거고. 그리고 단지… 너무 위험했거든.
네 감정을 너 스스로 감당하기엔.”
해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너는 누구야. 그리고 이 공간은 대체 뭐야?”
해인이 물었다.
시엔은 검은손을 들어 허공으로 그었다.
순간, 공간 한가운데에 빛의 입자들이 뭉치며 거대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점자처럼 무수한 빛의 입자가 흩어졌다 모였다.
그중 '슬픔'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자리에 '안정'이라는 대체 코드가 꽂혀 있었다.
“여긴 파문도서관의 하위 시스템. 정서와 감정 조율실이야.”
시엔은 이어서 말했다.
“너처럼 감정에 균열이 발생한 존재들은 여기로 옮겨진다.
기억이 손상되기 전, 감정을 봉인하거나 조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해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어렴풋이 먼가 기억해 냈다.
오래전 그날,
잊어버렸던 엄마의 얼굴, 비명 같은 울음소리,
그리고 병실의 형광등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의 얼굴.
그 속에 시엔이 있었다.
단 한 번, 아주 오래전 그녀의 눈을 마주쳤던.
“넌… 그럼 '감정의 설계자'야?”
시엔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설계자 중 한 명이지.
네 감정에 접근 권한이 있는 유일한 존재.”
“왜..?”
해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왜 내 감정을 조작했어? 왜 다 지웠어?”
시엔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벽면의 투명한 결정체 하나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움직이는 영상처럼 기억의 파편들이 담겨 있었다.
어린 해인이 눈을 감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의자에 앉는 모습.
그리고, 봉인의 의식.
“그날, 너는 선택했어. 기억을 잃더라도 네모라에 살아남겠다고.”
시엔의 말에 해인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젠 다시 선택해야 해.
봉인해 두었던 그 감정들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봉인된 채로 둘 것인지.”
“하필 왜 지금이지?”
해인은 물었다.
“너의 자각과 의식의 변화들이 이곳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었으니까,
이미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어.”
시엔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벽의 빛들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를 감시하던 다른 이들이 더 깨어나기 전에... 준비해야 하거든.”
“... 다른 감시자?”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인의 눈앞에 하나의 문이 떠올랐다.
투명하고, 단단해 보였지만 금이 가 있었다.
그 안에는 아직 꺼내지 않은 해인의 ‘진짜 감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곧 깨어날 것이다.
[다음 화 예고]
제6화. 감정 설계자의 방
- 기억의 수족관, 그리고 환상과 현실의 균열기억의 수족관,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