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삭제된 자들

감정이 사라진 도시와 경계의 균열

by ASTER

[침묵의 입구]


문이 열리자, 해인은 전혀 다른 온도를 마주했다.

감정 설계자의 방은 따뜻했지만, 이곳은 차가웠다.

공기조차 무채색이었다.

벽은 유리처럼 맑았지만,

그 너머로 흐르는 것은 색채가 아닌 정적이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녀의 숨소리마저 이질적으로 울렸다.

바닥은 지나치게 매끄럽고 소리는 무감각했다.

마치 모든 감각이 억제된 진공의 공간처럼.


[무표정의 군중]


거리를 걷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모든 행동이 효율적이고 기계적이었다.


한 남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어떤 맛도, 온도도,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

해인은 깊이 숨을 삼켰다.


'이들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을 흉내 낸 껍데기들인가?'


[삭제의 흔적]


폐허가 된 도시의 게시판 위에는

빛바랜 종이들이 간신히 붙어 나부꼈다.


“당신의 분노를 교환해 드립니다.”
“당신의 슬픔을 정제해 드립니다.”
“사랑은 위험합니다. 삭제 권고.”


종이 아래엔 작은 낙서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울 수 있어.’


해인은 손끝으로 그 문장을 더듬는다.

그 문장은 살아 있었다.


[감정의 증발]


광장을 지나며, 해인은 도시의 반복되는 루틴을 지켜봤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에 나와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방식으로 퇴근했다.

아이들은 울지 않았고,

연인들은 웃지 않았고,

노인들은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분노 없는 세상.

기쁨 없는 거리.

정돈된 질서.


그러나 그 안엔 '생명'이 없었다.

살아있는 것이 삭제된 거리들.

해인은 숨이 막혔다.

그녀는 혼자 속삭였다.


“이건 감정의 지옥이야,

조작된 집단의 무의식이야.”


[감정 설계자의 경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감정 설계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삭제된 자들은, 실패한 감정 실험의 부산물이야.

감정을 조절하다가… 결국 영혼까지 지워버린 셈이지.”


해인은 깨닫는다.

이 도시에는 희망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서로를 껴안지 않고,

아무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도, 고통도,

삶이 그려내는 어떤 예술도 없는 세계.


[교란자]


좁은 골목, 회색 벽 틈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만이 달랐다.

조심스러움, 두려움, 희망, 혼란… 감정의 잔재.


“넌… 다르다.”


그는 숨죽이며 말한다.


“이 도시가 널 감지했어.

넌 위험 요소야.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자신을 ‘교란자’라고 불렀다.


기억도, 이름도 사라졌지만,

마음만은 아직 남아 있는

삭제된 도시의 교란자.


[감정의 피난처]


그는 해인을 도시 외곽으로 안내한다.

불법구역.

시스템이 감시하지 않는 회색 지하공간.


벽면에 누군가의 손자국, 끄적임, 그림들.

무채색 세계 속에서 튀어나온 강렬한 색감.

분노, 사랑, 공포...

감정의 잔향들.


“이곳은 삭제되지 못한 감정의 흔적들이 모이는 곳이야.

우리는 잊히지 않기 위해 기록해.”


[감정의 연소]


갑자기 사이렌이 울린다.

도시의 감정 감지기가 반응한 것이다.

해인의 체온, 맥박, 뇌파.

모두 ‘감정 이상 징후’로 분류된다.


“도망쳐.”


그가 외친다.

그러나 해인은 도망치지 않는다.

광장 한복판,

그녀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당신들은 죽은 게 아니에요. 잊힌 거예요.

그리고 나는, 당신들을 기억하러 왔어요.”


[경계의 균열]


도시는 해인을 중심으로 이상 신호를 보낸다.

그녀의 감정은 중앙 통제 시스템에 균열을 낸다.

그녀는 이 도시를 나가야 한다.

하지만 떠나기 전, 그녀는 묻는다.


“이곳의 이름은 뭐예요?”


교란자는 말한다.


“이곳은 네모라의 심장.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유지하는 영점장."


[다음 화 예고]

제8화 – 「텅의 연못」

해인은 감정이 삭제된 도시를 빠져나와, 잊힌 자아들이 모여드는 ‘텅의 연못’으로 향한다.

그곳엔 그녀의 잃어버린 자아, 그리고 시엔과의 과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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