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감정 설계자의 방

기억의 수족관,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균열

by ASTER

기억의 문 앞에 선 해인은 망설였다.

금속으로 된 그 방의 입구는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명히 느꼈다.

저 안에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그녀를 당기고 있다는 것을.


감정 설계자의 방에 들어선 순간,

공간 전체가 감정으로 숨 쉬고 있었다.

벽면은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고,

그 너머에는 그녀가 잊으려 했던 장면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기억의 수족관 같았다.


해인의 앞에 감정 설계자가 등장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에는 체온이 담겨 있었다.


“환영한다. 해인. 네 안의 균열이 감정 설계 시스템을 깨웠다.”


설계자는 해인을 ‘감정 구조 시뮬레이터’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그녀의 감정 모듈들이 회로처럼 시각화되어 있었다.

억제된 감정: 붉은빛 너울
잊힌 감정: 회색 음영
과도하게 재현된 감정: 푸른 선형파동


“네가 느꼈다고 믿는 감정 대부분은, 빛의 파동이 재구성된 결과물일 뿐이다.”


설계자가 큐브 하나를 꺼내어 조작하자 어떤 장면이 펼쳐진다.

1. 어린 시절, 교실 : 모두가 웃을 때 혼자 외로웠던 기억 - 외로움
2. 대학 입시, 교문 앞 : 기다리던 부모님을 무시하고 집으로 뛰어오던 기억 - 실망
3. 입사 첫날, 자취방 : 자신의 능력과 가치 부족에서 오는 무력감 - 좌절, 분노

해인은 무너질 듯 무표정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설계자는 무심히 말한다.


“기억은 감정 위에만 서 있어.

진실을 찾고 싶다면, 감정을 먼저 정리해야 해.”


해인은 다시 장면들을 바라본다.

예전의 나라고 믿고 있던 것들.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방의 일부가 벌어지며 현실 세계의 병실이 비친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울고 있다.


“해인… 제발 돌아와 줘.”


“저건… 뭐죠?”


“현실이다. 네 감정이 지금, 두 세계의 경계를 흔들고 있어.”


해인이 억눌렀던 기억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순간,

거대한 수조가 파열된다.

방 전체가 진동하며 벽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는 시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해인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가… 지금 나를 보고 있다.'


감정 설계자는 해인에게 마지막 선택을 요구한다.


“이 감정들을 다시 조작해 통제의 수조로 담을까?

아니면,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둘까?”


해인은 맨발로 깨진 파편 위를 걷는다.

발이 아프다. 피가 난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일게요.
가두지 않고, 숨기지도 않고.


순간, 방의 구조가 변형된다.

차가운 큐브와 수조는 사라지고

감정의 파편들은 투명한 구슬 안에 맺혀

방울방울 빛난다.

설계자는 미소를 짓는다.


“넌 이제, 감정과 공존할 수 있는 첫 번째 인간이 되었어.”


그 말과 함께 문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도시가 펼쳐진다.

무채색의 인간들이 걷고 있는 풍경.


“다음 문은 감정이 사라진 세계. 삭제된 자들이 사는 곳이지.”


해인은 열린 문 앞에 선다.

등 뒤에서 시엔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넌 정말… 이 도시로 갈 수 있겠어?”


해인은 돌아보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도시를 향해

조용히 문고리를 잡는다.


[다음 화 예고]


제7화 :「삭제된 자들」


감정이 사라진 도시에서 해인은 ‘무감각’이라는 또 다른 감정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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