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텅의 연못

잃어버린 자아가 흘러든 곳

by ASTER

그 도시를 떠난 해인의 몸은

여전히 그 도시의 껍데기를 지니고 있었다.


폐허 같은 무감정의 제로포인트에서 빠져나온 후,

해인은 말이 잃었다.

그저 계속 걸었고, 숨 쉬었고,

사라진 것들의 잔향을 더듬었다.


그 때 그녀 앞에 나타난 건,

연못이었다.

물이 없고, 대신 안으로 빠져드는

심연 같은 어둠이 깊게 펼쳐져 있었다.

겉으로는 고요, 그러나 그 밑은 끝없는 침전지였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연못.

해인은 그 가장자리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이 연못을 건너야 하는걸까?'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연못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두려움보다 더 오래된 원초적 감각.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두려워하는

'오래된 자아'였다.


"자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 가라앉는다."


누군가 속삭였다.

해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 못했다.


"누구지? 어디서 나는 소리지?"


"텅.. 이건 텅의 연못.."


텅은 해인에게 다가왔다.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순식간에 텅은 해인을 삼켰다.

해인은 지금

연못속에 있었다.


'나는.. 죽은걸까..?'


옷이 젖는 감각도, 체온이 식는 느낌도 없었다.

그곳에선, 감각조차 무력했다.

감각이 소거된 최종의 자아들이 흘러드는 곳.


'나는 누구지?

그리고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


텅의 연못은 해인의 생각을,

자아의 감각을 반사하고 투영하는 거울이었다.

빛도 소리도 없었지만,

물 위에 펼쳐진 장면들처럼

어떤 기억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으로.



[장면 1 — 어린 해인이 화장실 안에 숨죽이고 있다.]


허름한 옷차림의 엄마가 어린 동생을 업고

맨발로 학교를 찾아왔다.

어제 미리 사둔 산까치 준비물을 들고.


"혹시 우리 해인이가 이 반이니?

준비물을 두고 가서 주러 왔는데"


친구들이 놀라 해인을 급히 찾는 동안,

해인은 교실 밖, 화장실로 숨었다.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아무 말 없이.


“부끄러움은 너의 감정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죄책감일 뿐.”


[장면 2 — 깊은 산속으로 상여가 올라간다.]


상여꾼들의 노랫소리.

방울소리와 곡소리.

울음과 노래가 뒤섞인 봄의 정취.

그녀는 무서웠다.

죽음이 아닌 자신을 잃고 ‘울어버릴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할머니, 잘가. 미안해.”

그 말조차 끝내 꺼내지 못했다.


두려움은 감정의 그림자다.
너는 감정을 버린 게 아니라,
감정의 반응을 부정한 거야.


연못의 물결이 점점 잔잔해진다.

그 위로 하나의 파문이 퍼진다.

그건 공백이었다.


텅이 말했다.

이제는 목소리가 아니라,

해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진동이었다.


“이건 네가 삭제한 자아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라는 이름 아래 버린 것.

네가 내게 맡긴 감정의 잔재.”


그 순간, 연못의 바닥이 열렸다.

해인은 검은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끝은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깊어질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인은 어떤 표면에 닿았다.

그곳은 물도, 땅도 아니었다.

그녀가 결국 딛고 선 건, 기억의 정지선이었다.


그 반대편에 누군가 있었다.

그 실루엣은 그녀와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낯설었다.


시엔...?


그러나 이번의 시엔은 감시자가 아니었다.

기억을 지켜보는 증인이자

그녀가 잃어버린 자아였다.


그의 입이 움직인다.

그러나 소리는 없다.


기억을 돌려받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감정을 감당하는 건 네 몫이야.



해인은 다시 떠올랐다.

연못 위로, 시간 위로, 감정 위로.

손에는 작고 묵직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숨겨온 감정의 결정,

눈물 한 방울이었다.

따뜻한 온도의 그것은

감정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어느새 텅은 사라졌고,

텅이 남긴 공백안에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누워있었다.


[다음 화 예고]


제9화 : 「심해의 거울」


감정의 결정, 눈물을 되찾은 해인은 ‘심해의 거울’과 마주한다.

그곳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공간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이 뒤섞인 곳.

그녀는 그 안에서 잊힌 시간의 파편과 마주하고,

마침내 시엔과의 과거, 그리고 ‘감시자’의 기원에 가까워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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