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남아, 다시 직면하게 한다
[해인의 독백]
거울 속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그 얼굴은 분명 나인데, 나라고 부르기엔 낯설다.
내가 잊은 감정들이, 그 눈동자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텅의 연못을 다녀온 이후, 나는 자꾸만 같은 꿈을 꾼다.
깊은 물 아래 가라앉은 채, 떠오르지 못하는 누군가의 기억.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는, 이상한 상태.
꿈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현실 같고,
현실이라 부르기엔 모호한.
그 속에서 나는 자꾸 어떤 실루엣을 보게 된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먹먹해진다.
그는 늘 내 앞에 나타나기 직전,
잔잔한 물결처럼 무언가를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나를 시험하듯 묻는다.
“넌 정말,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는 거야?”
해인은 무중구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한다.
이 곳은 심해.. 깊은 압력이 전해져 온다.
출입 금지 구역
감정 붕괴 위험,
고도 기억 압력 주의...
수많은 경고 문구가 붙어 있는 이곳은
마치 오랫동안 무언가를 가두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차갑게 녹슬어 있다.
심해의 한 공간
어두운 습기와 함께 밀려드는 정적.
감정이 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그런 짙은 밀도가 가득차 있다.
가장 깊은 곳.
유리처럼 반짝이는 검은 빛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물처럼 매끄러운 거울 위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인은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하지만 그건 자세히 보니
해인 자신이 아닌
어쩐지 자신이 잃어버린 표정을 지닌,
자신과 닮은 존재였다.
해인
낯익은 목소리가 속에서 울렸다.
해인의 앞에는 시엔이 서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내듯,
거울 속 빛의 가장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야 왔네.”
“여긴 뭐지.
왜...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해인의 옆에 선다.
그리고 해인에게 말한다.
나를 여기에 남기고 간 건 너였어.
잊었어?
난 네가 지우고 싶어 했던 감정들이야.
견딜 수가 없어서,
너는 나를 이곳에 가두고 너의 세상으로 돌아갔지.
해인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기억 없어.”
시엔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래야 네가 무너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아.
너는 계속 그 조각들을 느끼고 찾고 있었어.
네모라의 회의실에서,
무중구의 입구, 파문 도서관과
감각이 사라진 도시의 거리들에서,
텅의 연못에서,
네가 있던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너의 감정의 흔적들이 널 계속 부르고
기다리고 있던거야.”
시엔이 거울 수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물이 흔들리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울 속 해인은 천천히 울고 있었다.
말없이, 눈물도 없이, 금이 간 틈사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야만 했던 그 날들의 해인이었다.
“기억나니?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너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버렸고, 나를 잊었어.”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건 단지 ‘사실’의 온도였다.
해인은 묻는다.
“내가 버린 그 감정이... 뭐였는데.”
시엔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한다.
그건 네가 스스로 꺼낸 슬픔들이었어.
그 슬픔들은,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시엔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갑자기 받아들이기는 버겁다는 듯이.
하지만 뭔가를 지우고
감정의 잔재를 남겼다는 것만은
어느새 진실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시엔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거울 위의 물결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해인은 물속에 비친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시엔은 정말 나일까,
아니면 내가 남기고 간 또 다른 나일까.
이제 나는, 어떤 사실을 잊은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다음화 예고]
제10화 : 「초록안개숲」- 선택의 안개 속에서
무중구의 초록안개는 선택을 강요한다.
남을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해인은 자신 안의 무언가를 다시 마주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