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핵심, 그리고 감정설계자와의 결별
안개가 걷히고, 고요가 내려앉는다.
해인은 마침내 무중구의 중심,
‘제로포인트’에 도달한다.
모든 감정이 수렴되는 곳.
시간과 공간의 흐름조차 멈춘 그곳에는
감정설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엔.
그는 이전보다 더 또렷해져 있었다.
이제는 어떤 형체나 해인의 모습을 비춘 반사체가 아닌,
감정 그 자체로 이루어진 단단해진 존재로서.
해인을 바라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고 밀어내고 외면했던 모든 감정들이,
이곳에서 되살아났다.
두려움, 분노, 슬픔, 외로움.
기쁨, 환희, 우울, 좌절.
감정의 총합이 소용돌이 쳤다.
그러나 해인은 도망치지 않았다.
“널 처음 봤을 땐 이해할 수 없었어.
왜 날 시험하는지, 왜 자꾸 내 감정을 흔드는지.
왜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 왔는지”
해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알아.
너는 내가 만든 거야.”
시엔은 말없이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스쳤다.
“너는 내가 만든 그림자야.
내가 버리고 싶었던 감정들을 모아 만든 방어막.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약해지지 않기 위해.”
“… 그래 맞아.”
시엔이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인정한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명료했다.
“나는 너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감정의 형상.
너를 대신해 화내고, 슬퍼하고, 너의 세계를
떠나도록 설계된 존재지.”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내가 직접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어.
두렵고, 아프고, 복잡한 그 모든 것들을.
긴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시엔의 음성이 들린다.
이제 너는 네 감정의 주인이야.
나는 너를 대신할 수는 있어도,
감정의 주체가 되는것,
그건 절대 되어줄 수 없는 일이었어.
그의 몸이 서서히 빛으로 변해간다.
안개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존재가,
해인의 가슴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한다.
해인은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감정을 인정하고, 통합한다.
제로포인트가 흔들린다.
무수한 감정의 좌표들이 재정렬되고,
다시 무중구가 보인다.
그리고 그 무중구의 중심에서 하나의 둥근 문이 열린다.
해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발을 내디딘다.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문,
둥근 곳으로 나아간다.
빛이 그녀를 감싸 안는다.
[다음화 예고]
제12화. 「둥근 문의 저편」-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
감정을 내면 깊이 인식한 해인은 둥근 문으로 나아가고, 그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