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안갯속에서
안개는 방향을 지우고 기억을 감췄다.
해인은 이제 낯선 숲에 들어서 있었다.
초록빛이 스며든 안개가 허리춤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끼 낀 나무들 사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실루엣이 자꾸 눈에 걸렸다.
“시엔?”
그녀는 조심스레 부르며 앞을 더듬었다.
그러나 대답은 안개처럼 맴돌 뿐, 돌아오지 않았다.
안개는 생각을 묶고, 감정을 어지럽혔다.
희미한 녹색빛 빛바랜 기억처럼, 낡고 끈적였다.
힘을 내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순간,
나무줄기 옆에 먼가 서 있었다.
안개속 방울같은 그것들은 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에서 마주쳤지만, 얼굴은 없었다.
그러나 그 눈빛 없는 시선에 해인은 묘한 친숙함을 느꼈다.
‘이 느낌… 어디서…’
그리고 문득 떠오른다.
아무도 찾지 않던 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
해인은 그것들을 외면했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너무 슬펐기 때문에.
안개는 해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너의 곳으로 돌아가.”
그때, 시엔의 목소리가 숲 어딘가에서 울려왔다.
숲의 안개는 선택을 요구해.
남을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선택?”
해인이 되묻자, 시엔은 대답한다.
“여긴 단순한 숲이 아니야.
너처럼 ‘기억속 감정을 붙잡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층위야.
그리고 여기에 도달한 자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해.”
해인은 말없이 안개속을 바라본다.
초록빛이 진동하듯 계속 흔들리고 있다.
이곳은 그녀 자신의 내면이 만든 공간이었다.
“난 아직 돌아갈 수 없어.”
해인은 처음으로 그 말을 입 밖에 꺼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더 알고 싶어.”
“좋아. 하지만 그 선택이 균열을 일으킨다는 걸 알아둬야 해.”
시엔은 어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넌 감정 단순화 처리 대상이 아니야.
너의 기억은 다층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너의 감정을 설계 단계부터… 손댔을 수도 있어.”
“무슨 말이야?”
“그건 너도 알게 될 거야. 그전에 네가 첫 기억을 다시 봐야 해.”
안갯속에서 파문처럼 장면이 퍼지고 있었다.
- 흐릿한 복도.
- 주저앉아 누워 울고 있는 여자.
- 복도 끝에서 그녀를 데려가는 남자의 손.
-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소녀.
“저들은… 누구지?”
“감정 조정자.”
“그럼 난?”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네가 감정의 기억들을 끊어낸 순간,
네가 있던 세계는 너를 ‘중립 상태’로 분류했어.
하지만 너는 감정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어.
오히려 어딘가 깊이 숨겼지. 네 안에 여전히 조각난 채로.”
“어쩔 수 없는 세계의 방식을 따라
넌 감정을 끊어내고 외면하며 살아왔어.”
시엔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며
이 모든게 시작되었지.
그게 지금 너를 이 안개숲까지 이끌어온거야.
그 순간, 안갯속에서 또 다른 해인이 나타났다.
해인과 똑같은 얼굴.
그 해인은 웃고 있었다.
“그건 너야. 너의 또 다른 감정,
네가 만들어낸 반사체.”
해인은 눈을 감고, 마음속에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내가 만든 이 세계들을…
끝까지 보고 싶어.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직은.”
시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다음으로 향해야 할 곳은
감정의 최중심 좌표,
제로포인트야.”
“그곳에서는…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그건 너만이 결정할 수 있어.
지금까지처럼.”
안개는 점점 걷히고 있었다.
숲은 숨을 멈추듯 고요해졌고,
해인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숲 밖으로 난 길들이 어디로 이어질지
그녀는 여전히 몰랐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제 그녀는 누군가가 설계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며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화 예고]
제11화. 「제로포인트 」: 감정의 재정렬
감정의 핵심으로 향하는 해인,
그리고 감정설계자는 결별을 이야기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