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시엔의 그림자

기억이 움직일 때, 감시자는 깨어난다.

by ASTER

공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빛이 비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해인은 여전히 파문도서관에서 보았던 감정의 여진 속을 걷는 듯했다.

무중(無重) 공간, 무언가가 부유하는 틈.

그때,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 떠올랐다.

[루운 시스템 경보]
* 감정 노출률 : 37.8%
* 기억 흐름 : 과열
* 감시 단위 : 시엔(SIEN) - 반응시작

문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까지는 1초 남짓.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시야 속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보여주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해인은 놀랐지만, 분명 어떤 이름을 보았다.

시엔…?


입안에서 낯선 발음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 이름.

하지만 모든 것이 모호해진 지금,

아무리 끌어내려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그녀가 지나가는 풍경은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벽에 걸린 포스터처럼 흐릿해졌고,

거리의 자동차들은 조형물처럼 정지해 있었다.

공간이 점점 감각을 잃고 있었다.

바람도, 소리도, 냄새도 감정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정렬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노출하지 마세요.


이번엔 명확한 소리였다.

누군가 그녀를 훈계하듯 말하는 목소리.

조용하지만 분명했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감긴 시계가 진동했다.

시계 화면이 일그러지며 무언가를 ‘재생’했다.


기억을 과도하게 열람할 경우 감시자가 깨어납니다.
감정의 동요를 주의하십시오.
시엔, 시엔 - 감시자 반응 시작.


해인은 멈춰 섰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시엔'이라는 단어가

벌써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녀의 생각을 누군가 읽고 있는 것일까

어떤 시스템이, 그녀의 감정을 감지하고 반응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해인의 뇌리에 오래 전의 기억이 재생되었다.

혼자 남은 책상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해인.

누군가 다가와 발밑에서 멈췄고,

그림자만이 발치에 길게 드리워져 있던 장면.

그림자 속에는 무언가가 살아있었다.

눈은 없는데 눈빛이 있었고,

형체는 없는데 존재가 느껴졌던 그날.

그 기억 속의 감정과,

지금 이 순간의 불안이 겹쳐지며

해인은 처음으로 확신에 가까운 직감을 느꼈다.


그때, 그것이… '시엔'이었을까?


주변 풍경은 점점 말라갔다.

공기는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건 단순한 공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해인이 기억 속에서 감정을 강하게 느낄수록

어떤 시스템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림자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벽 너머, 유리 반사면 속.

드디어 그림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 안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단지 관찰하는 존재만이,

해인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억의 파동이 기준을 초과했습니다.
감정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소리는 더 이상 환상 또는 환청이 아니었다.

명확한 지시로 그녀에게 울렸다.


지금,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알고 싶었다.

‘시엔’이란 무엇인지.

그 존재가 왜 자신을 쫓고 있는지.

그리고, 왜 기억을 되찾는 것만으로 누군가가 깨어나는지.


공간 끝, 서서히 열리는 문.

그 문은 자물쇠도 손잡이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그 문 너머에서, 시엔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화 예고]


제5화 : 「감정의 설계자」


억압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누가 그것을 설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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