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
전전세로 힘겹게 아이들 4명을 키우고 살던 터라 운동할 때나 등산할 때나 오직 구두 하나로 버텼던 선지철 소방관. 여느 때처럼 출근길에 나서는데, 등 뒤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당신 구두 너무 낡은 거 같은데… 이젠 그만 신고 바꿔야겠어요.”
“응? 아니야! 아직 멀쩡해. 난 괜찮으니깐 신경 쓰지 말아요. 다녀올게요.”
며칠 후, 전날 24시간 당번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 보니 현관 앞엔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새 구두가 놓여 있었다.
“여보, 이 구두는 뭐야?”
“여보, 이젠 그 구두는 그만 신어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구두 새로 샀어요.”
처남이 아내 생일을 축하한다며 보낸 상품권으로 아내는 본인 선물이 아닌, 남편 선지철 소방관의 구두를 샀다.
선지철 소방관은 ‘뭘 이런 걸 샀냐며’ 투덜거렸지만,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내가 사준 신발 덕분일까? 출근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새 구두를 직원들에게 뽐내고 싶었지만, 출근과 동시에 소방서엔 구급 출동벨이 울렸다.
“구급출동! 구급출동! 거동 불편 환자입니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신고.”
배에 복수가 차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자 119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 지금이야 계단용 들것도 있고 안전한 이동을 위한 다양한 장비들이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90년대에는 변변한 장비도 없어 직접 업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배에 복수가 차서 업히는 게 힘들겠지만… 제가 업어서 1층까지 내려가 볼게요.”
가파른 계단 그리고, 비좁은 계단 폭은 자칫 2차 사고까지 발생할 수 있어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입에선 가쁜 호흡이 내뱉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내려오던 중, 선지철 소방관은 뭔지 모를 따뜻함이 등에서부터 허리 그리고 구두 속 발까지… 축축하게 전해졌다. 선지철 소방관 등에 업혀 있던 환자가 그만, 소변을 본 것이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천천히 내려갈 테니깐 꽉 잡기만 하세요.”
애써 괜찮다며 1층까지 내려온 뒤, 환자를 무사히 병원까지 이송한 뒤에야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가지와 신발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아, 이걸 어떡하지? 제대로 신지도 못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전날 아내가 사준 구두가 걱정이었다. 소방서에 도착해 햇볕에 말려보기도 하고 구두를 닦아보고 씻어보기도 했지만, 어떻게 된 게 소변 냄새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구두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 구두가 아닌 헌 구두를 신고 퇴근한 선지철 소방관.
“여보, 새 구두는 어떻게 하고 낡은 구두를 신고 왔어요?”
“아! 그거 아까워서 닳을까 봐. 회사에 놔뒀어. 근무할 때만 신으려고.”
“아깝기는 뭐가 아까워요. 그냥 신어요. 다음에 또 사면되죠.”
어려운 살림살이에 큰마음 먹고 구두를 선물한 아내가 하루아침에 구두를 못쓰게 됐다는 걸 알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때론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지 않을까?
<광주 광산소방서 평동119안전센터장으로 퇴직한 선지철 소방경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