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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Sep 30. 2024

[4]

학교는 행사가 정말 많았다. 소위 말하는 학교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온종일 공부도 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둥둥 떠 다니는 마법의 문장이 있었다.


'1학년 때는 놀아. 군대 가면 다 잊게 되어 있어.'


통통 튀는 둥근 공만 보면 달려들었던 나는 모든 학교 행사에 다 참여함도 모자라 틈만 나면 축구와 족구를 했고 주말 축구 동아리 활동도 빠지지 않았다. 인생 최고 전성기의 가도를 달려가는 신체였기에 피곤함은 하루 자고 나면 귀신같이 회복이 되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고 학기 초부터 선배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한 단대 체육대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법정대학 앞에는 족구장이 있었는데 사실은 자동차 주차라인이었고 그 크기가 4 대 4 족구를 하기에 딱 맞아떨어졌다. 학기 초부터 족구장을 평정해 온 우리 과는 체육대회 종목 중에서 축구, 농구, 족구를 우승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최상단 꼭짓점에는 형이 있었다. 형은 체육대회를 총괄하는 선배로서 모든 경기 일정을 챙겼고, 선수들을 모아 연습도 도왔다.


나는 형이 농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형이 농구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 멤버를 구성하고 농구를 연습하는 형은 축구할 때 보다 더 진지하고 행복해 보였다. 축구할 때 골키퍼를 하는 형은 농구를 즐겨했기 때문에 볼을 손으로 다루는 게 편해서였던 것이다. 축구는 변수가 많아서 최선을 다 해야 하는 종목이었고 족구는 그 누구도 우리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형이 족구는 걱정 안 해도 되지? 우승할 수 있지?"


형은 족구만큼은 너희들을 믿기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족구장을 평정한 우리도 족구만큼은 당연히 우승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합 당일 '그'가 나타났다. '그'로 말하자면 법정대학 행정학과 휴학생으로, 작년에 족구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말로만 들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휴학생이 체육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가 논의되지 않았었고, 우리 형은 '그'와 친분이 있음에도 휴학생은 참여해선 안된다는 주장으로 논쟁을 했다. 결국 3세트 중에서 1세트만 전설의 '그'가 참여하도록 합의가 되었다.

나, 그리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수비를 맡았는데 웬만한 공격은 모두 다 막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일반인과 달랐다. 아마추어 수준에서 정점이라고 할 만큼의 힘과 정확도였다.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결국 내가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첫 번째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두 번째 세트는 승리를 따내고 마지막 세트 전에 또다시 전설의 '그'가 경기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형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완벽한 승리가 아니면 찝찝함이 남아 있을 것이고, 이겼다고 하기도 부끄러우니 당당하게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자고 했다.


"휴학생이 참여해도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깁니다."


형은 우리 과를 대표하여 자신 있게 체육대회 운영진에 의견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기기 힘들 것 같다는 얘기도 오고 갔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실수를 줄이면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생각해 보니 몸은 '그'의 힘과 기교에 적응하고 있었고, 우리들 역시 더 빠르고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한계인 줄만 알았던 우리 신체의 혈을 뚫어 벽을 허물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형을 한번 쳐다보았다. 형은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응원단에게 더 큰 호응을 주문했다. 아, 스포츠란 이런 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에너지를 쏟아내서 서로가 하나의 에너지로 연결되는 것이다.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그 에너지가 전달될수록 소름이 돋았고 몸은 더 가벼워져서 저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팀의 에너지가 더 거대하고 진득한가에 응원전이 펼쳐졌다. 목청이 찢어져라 울려 퍼지는 소리와 진득한 에너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수들의 이름이 들어간 멈출 줄 모르는 응원가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계속 길어지는 렐리, 강한 공격과 아슬아슬한 수비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태어나서 이런 에너지를 직접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장 한 구석의 족구장을 둘러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비할 공간마저 넉넉하지 않을 정도였다. 체육대회 운영 요원들이 공간을 확보해 주었고 마지막 3세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공격 패턴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고, 계속되는 날카로운 공격과 아슬아슬한 수비가 반복되었다. 말 그대로 창과 방패였다. 수비를 해 낼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 소리가 나왔다.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격을 연속으로 받아 냈다. 우리의 계속되는 수비에 놀란 그는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빗나가는 공격이 많아졌다. 그가 더 이상 전설로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 는 갑자기 공격을 하지 못하고 가볍게 공을 넘기기기 시작했다. 공격을 해도 득점이 되지 않으니 실수를 연발하고 체력이 떨어진 것이었다. 우리 과는 공격이 약하고 수비가 좋았기 때문에 매우 어렵게 점수를 쌓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양 팀의 점수는 비슷했고, 결국 많은 심리적 부담과 체력 저하로 는 실수를 연발했다. 상대팀의 강한 공격을 수비로 받아 내고 우리가 득점을 할 때마다 수많은 응원 속에 단연 귀에 박힌 것은 형의 목소리였다. 경기 중에는 집중을 하느라 형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형이 열렬히 응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3세트를 힘겹게 승리하고 나서야 형을 찾았다. 모두가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린아이 보다 더 빛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형이었다. 우리가 이긴 것도 좋았지만 다른 과에도 친분이 많은 형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 더 흐뭇했다. 그날의 족구시합은 대단한 경기 내용과 응원으로 전설이 되었고,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맑은 하늘에 조금 이른 반팔차림으로 모두가 목청껏 내지른 응원소리가 있었던 5월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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