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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Oct 15. 2023

슬픔의 총량

여름 단상

글 - 슬픔의 총량


그림 - 타 죽지 않는 법_정방형



***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아침. 고개를 앞으로 조금만 기울여도 정신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괜찮다는 말을 할 여유는 없다. 뜨거운 시럽을 담은 컵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일부는 굳고 일부는 넘치고 탄내와 단내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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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이도 숙취를 느낄 수 있으니 이득이 아니겠냐고 너스레를 떨어볼까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에 가득한 수심이 폐를 짓눌러 알량한 용기로는 몸을 세우는 것조차 버거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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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면 괴상한 낮잠이 밀려드는데 너무 깊고 무거워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고 만다. 노인의 몸에 빈번히 찾아드는 죽음의 연습이 이와 같을까. 이리도 잔인한 것이라면 삶을 갈구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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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수세미처럼 온몸으로 식은땀을 쏟아내면 목구멍에서 소독제 냄새가 나고 의식이 흐려진다. 온 힘을 다해 삼킨 것들이 게워지고, 수많은 다짐이 무색하게 열패감만 남게 될 때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걸 좋아했고, 싫어했고, 무리했고, 게을렀고, 지쳤다는 것을 겨우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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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주마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죽음 같은 사고의 정적 후에는 치르지 않은 슬픔이 터져 밀려드는데, 빚은 제때 갚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화재경보처럼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운명에 순응하며 기도해야 할 것 같지만,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면 족하다. 아니면 죽거나 잠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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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재구축을 위해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은 약한 마음으로 태어난 이들의 숙명이자 장기다. 나는 눈을 감고 괜찮아지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는다. 이런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도도 곁들인다. 그럼에도 아주 괜찮은 날에 이유 없이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눈물 흘릴 테다. 두려워 미리 아파한다고 해결될 일은 못 된다. 하루하루씩 값을 치르며 무너지는 나를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무너진 것들 하나부터 쌓아 올리며 어쩔 수 없이 하루를 견디는 나날.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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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나는 괜찮지 않을 거야. 아무렇지 않던 나날에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슬픔과 거기 딸려 쏟아지는 소소한 기억으로 그리운 이들의 음성을 떠올리겠지. 있잖아.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죽음과 비슷한 잠에 빠지기 직전에 미친 척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고 말이야. 그러면 사랑은 잠든 사이 여름날 정원의 잡풀 같아서 원든 않든 자랄 테니까. 자르고 또 잘라도 잠시 눈을 돌리면 웃자라 길을 지우고 말 테고, 파란 하늘과 흘러간 구름 쫓다 보면 어느새 방향을 잃을 테니까. 어쩌면 한없이 사랑에 가까운 마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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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말하고 나니 역시 죽는 게 제일 현명한 선택지일지 모르겠다. 그보다 나은 해결책은 없으나 우린 삶을 이어가기에, 기어코 상처를 주는 것을 택하는 거겠지. 너를 해치고픈 욕망은 외로움일까.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일까. 상처 입고 휘청이는 상대를 보며 위안을 받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 참 지독한 인간이네. 어쩌면 오늘 밤에 마실 술과 내일의 숙취처럼 고통으로 자신의 존재를 헤아리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몰라, 모르겠다. 모른다는 말로 안녕을 대신할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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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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