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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Nov 29. 2023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것

겨울 단상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것




 


***


 




 


마음속에 숱한 번짐이 버겁다. 주저앉은 구름처럼 말은 나날이 무거워진다. 맞닿은 입술은 끝끝내 눌어붙어서 아무 말 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자연히 겁나는 것 몇 개 있는데, 그날이 와도 미련하게 더 살고자 할까 봐서 그땐 얼마나 큰 힘으로 침묵에서 벗어나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아서 불안하다.


 


- 여름날 대시보드 위에 녹아버린 캐러멜을 다시 네모나게 만드는 거 무슨 의미 있을까. 그러면 현재의 우린 영영 사라져서 왜곡된 기억 속에서 훼손당할 거야. 그걸 인지조차 못 할 테고 그래도 괜찮은가.


 


무거운 질문에 돌아올 답 없다는 거 알면서도 짓궂게 묻는다.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된 후로는 마음 한가운데가 푹 눌린 듯 가슴이 답답하다. 녹슨 못을 핥는 거처럼 입안이 비릿하기도 하고 어딘가 편치가 않다. 분지에서 지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다른 지역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열기와 냉기가 이매망량처럼 분지의 언저리를 떠돌다가 다음 계절에야 꽁무니 빼는 일을 보는 게 얼마나 꺼림칙한지. 최근 나는 영락없이 그 꼴을 빼다 박았다. 곧 지독한 몸살을 만나 진저리칠지도 모른다. 열대화가 시작되어서 사계절 언제라도 비 내릴 수 있다니 어쩌면 내 마음이 미래에 가장 적당할까. 참 시답잖은 농담이다.


 


-한국에 퐁피두 센터가 생긴다니 그때까지는 살아야겠어.


 


그럴싸한 낯빛으로 너스레 떨고 단어 몇 개 나열하면 금방 유쾌한 이가 된다. 이제야 다들 안심하는 눈치다. 새카만 내 속이 스테인리스의 얼룩처럼 노란색 파란색으로 빛나는 모습 언뜻 보석 같아 보이는 것일까. 정작 보석을 꺼내려고 안 주머니에 손이라도 넣을라치면 총 뽑아 들 사람 보듯 기겁하면서 말이다. 누구도 진실을 원하지 않으니 우린 결국 타인에게 한없이 낯선 괴물이 되어 잡아먹고 먹히며 산다. 그러니 입을 벌리고 달라붙은 녹이며 이끼며 자랑하고 적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것이다. 그 커다란 입속에 머리 넣는 것은 무섭지도 않고 거기에 송곳ㆍ독침 없다며 안심하다니 우스꽝스럽기 짝없다. 물론 나도 다를 바 없으니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다.


 


- 맞아 맞아. 그렇지.


 


한 시간에 개인이 연기하는 거짓의 허용치는 몇 개까지일까. 삶이란 극이 아닌데 다들 그걸 잊었다. 나는 어째서 평화로운 자리에서 이런 추악한 생각의 꼬리를 쫓게 됐을까. 차라리 망막박리가 아닌가 싶은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 녀석처럼 허공이나 쳐다보면 족할 것이다. 왠지 나는 힘내어 웃을수록 죽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잘 해낼 수 있겠다며 안심하는 꼴이 담뿍 수치스러워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다. 난 어디까지고 나를 보며 안심하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쏘아진 화살이 바닥이든 표적이든 향하는 거처럼 관성으로 손뼉 치고 얼굴 근육을 움직인다. 이런 나도 살아남았으니까 당신들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걸 알린다면 더욱 완벽하지 않을까.


 


- &*%^g헤


 


다행히 웃는다. 행복해 보인다. 그거로 됐다. 진실의 유무와 별도로 누군가 살아갈 힘을 얻는 것에 악의란 없을 것이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거짓말이다. 어차피 거짓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정한 분류이니 까만 거짓말, 하얀 거짓말이라는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때에 따라 적당히 꺼낼 수 있어야 하는 거겠지. 진실밖에 모르는 내 마음 더 새카매져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겁도 없이. 나도 누군가의 새카만 속 갉아 먹으며 눈을 반짝이고, 잠든 사이에 불침번 선 그들 덕에 빛의 방향 찾으며 신세 지고 있으니까. 정보 처리 과정에서 과열되어 굉음을 뿜는 팬. 뿜어져 나오는 온기로도 우리는 타인을 감각할 수 있는 것일까.


 


- 노트북을 덮고 나면 몇억 광년은 떨어진 별로 추락하는 기분이야.


인사 몇 번 한 게 고작인 동료에게 혼잣말을 들켰다. 그 사람 작게 웃음 지으며 오늘 하루 잘 보내라고 말하고서 떠났다. 띠링. 검은 화면 너머에 정다운 마음은 이내 차가운 푸른빛으로 변한다.


 


지쳤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서서히 지친 탓에 힘을 계속 낼 수 있는 상태라서 더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에서는 완벽하게 진력이 나버렸다. 어떤 아픔이든 구체화해야 하는 강박도 견뎌낼 수 있다며 자신하는 위태로움도 더는 참을 수 없다. 정오에서 한시 사이 볕을 맞으며 드러누워서는 언제 끊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담배 한 개비 간절하다. 여름날 눈감고 언덕 내려가며 이대로 모든 게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간절함이 겨울에도 번져있다. 안과에 가봐야 하나. 기어코 난 겨울마저 사랑하게 된 거다. 어쩌면 연인 사이 으레 말하는 배신을 나도 저지르게 된 걸까. 하필이면 그토록 나한테 헌신적이던 여름에게? 그럴 순 없다며 당장에 더러운 겨울 하늘에 침을 뱉는다. 내 볼에 소복소복 눈이 올라앉는다. 가장 멋진 눈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너에게 보여줘야지.


 


군중 사이에 뒤섞여 웃는 일은 간편하고, 결여된 침묵은 절대적으로 저열하다. 뭐든 말해버리고 나면 후회와 수치심뿐인데 무얼 그리 떠들고 싶어 안달인가 나는. 거실에 떠다니는 먼지나 쫓으면 충분하다. 한 번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묻고 싶긴 하다. 좋아하는 것마저 증오해야 살아갈 수 있는 때가 있으신가요 하고. 한국은 자살률 1위 국가라는데 사람들은 다들 괜찮아 보인다. 누구든 아픔이 없겠냐는 에두른 위안으로 내일로 향한다. 다들 강해야 한다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게 타인을 이기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매번 속이 메스껍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김포 공항을 빠져나오는 지선버스를 타는 기분이다.


 


- 스─읍!


 


갈비뼈 저릿하도록 들이쉰 숨을 한동안 머금는다. 당장은 무엇도 할 수 없다. 뱉지 못한 말들 횡격막 밑으로 내려앉기를 기다린다. 덜컥 덜커덕.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 그대들 대체 왜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으나, 죄스러운 마음에 나도 나를 사랑하려 애쓰며 웃는다. 하찮아빠진 고통에 허덕이는 내 꼴이 빨간 대야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개구리 같다. 뒤주에 갇힌 쥐새끼 같다. 나의 상처를 모욕해야만 겨우 견딜 수 있는 하루를 사랑하는 대체로 모순적인 귀결에서 나는 사랑이 무어냐 묻고 싶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삶에 지친 상태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배우는 과정은 정말 고됐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밤도 더러 있었다. 이유 없는 눈물이라며 넘기는 수밖에 없는 새벽은 여전히 잦다. 터져 나오는 고통 오롯이 받아 적었다면 나는 죽고 싶어 안달 난 괴인이었을 것이며, 아프다며 낑낑거리는 동네 강아지, 건너 건너 얼굴만 겨우 아는 성인 잡지사 직원, 가방에 헌팅 나이프를 넣고 다니는 보험 설계사, 태양광 사업이 비전 있다며 으스대던 절교한 친구 꼬락서니였을지도 모른다. 인내심이 커서 다행이다.


 


오늘은 아무에게도 읽히고 싶지 않아서 웃는 낯짝을 택한다. 그래야만 아픔을 적재적소에 숨겨둘 수 있다. 이렇게 아파도 어떻게든 전해야 하는 마음이란 얼마나 무거운 걸까. 저울의 동전 건전지가 또 방전이라 알 수 없겠다. 적당히 말하자면 20kg 정도 되는 아픔.


뱉지 않으면 역치 이하의 하찮음이라고 여겨지는 사랑, 누구나 겪는다는 고통, 향토 병이 되어버린 우울을 0이라고 칭하는 우리.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나는 속이 답답해서 냉장고로 달려가 제로 콜라 너덧 병 들이켜고 배탈이 난 참이다. 무거운 마음에 자물쇠 거는 날. 오늘도 나는 참아낼 수 있을 테다. 그러니 도와달라는 말,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슬프다는 말, 괴롭다는 말, 말이라는 말 모두 아낀다. 아끼다 보면 내 마음 재가 될까. 남은 알맹이는 사람들 말하는 대로 반짝이는 보석 될까. 아무렴.


 


가만히 창가에 앉아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마음 간추려지지 않아 나는 오늘 몹시도 괴로웠다. 아마 내일의 나는 내가 아닌 더 좋은 누군가일 것이다. 매일 나를 죽이려는 나를 죽이는 나는 좋은 사람인 것이다. 미루고 읽지 않은 잡지. 소설책. 시집. 당신의 마음. 답하기 망설여지는 수많은 질문. 웃음에 묻어 둔 하찮은 진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해결되는 일이 있다던데 그건 기적의 다른 이름 아닌가.







20231129초고

1130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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