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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Dec 07. 2023

극락전에서

극락정토라도 자칫하면 타버리는 일


극락전에서 (극락정토라도 자칫하면 타버리는 일)



***




잡히는 대로 화산구에 집어 던진다. 쓴 적 없는 펜대, 하찮은 장기 뽐내고서 받은 상장, 기름때랑 먼지 엉겨 붙어 손댈 수 없던 낡은 책들. 풍덩 풍덩. 그러다가 신나서 남이 벗어둔 겉옷까지 손대고 말았다. 아차 하는 사이 노란 원이 된다. 리듬을 맞추다 보니 덩달아 뛰어들고프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잡화점에서 반값에 산 수경을 챙겨올걸.





물건엔 기억이 든다 했다. 그 기억은 잊힌 세계를 구체화 시킨다. 평평한 바닥에서 시작한 콩알만 한 세상이 발아해서 수직으로 심고주心高柱 올리고 대들보에 서까래 얹고서 기어코 지붕까지 걸친다. 반가운 얼굴 문 앞서 감기들라 아가하고 손 흔드는 것이다. 피-이, 비 좀 맞으면 어떻다고. 여름부터 겨울까지 팔각 목기에 놓인 것 수박으로 귤로 변하는 억겁의 시간이 끝날 때 평상에 동그맣게 앉은 쪼글쪼글한 얼굴 수첩에 따온다. 못다 한 작별 인사 닿으라고 휘휘 휘갈긴다.





용암은 던지는 족족 삼켜 시원찮은 트림 뱉는다. 얼굴이 벌게지게 뜨거운데 맘에 들어찬 서리는 당최 녹질 않는다. 얼어붙은 입술 투레질하고 있으니 옷 주인이 와서 소리친다. 여기 있던 옷 못 보았냐고. 네가 집어 던졌느냐고. 집에 너만 한 자식이 있다고. 나이도 어린놈이 어쩌고저쩌고.

아뇨, 난 모릅니다. 방금 온 참이에요. 딱 잡아떼고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한다며 콧잔등에 주름 잡아넣었다. 극락왕생하세요.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요. 염불 외는 법 배운 적 없어서 눈 감고 손바닥에 목탁 치는 시늉하니 옷 주인이 그제야 포기하고 돌아선다. 콧바람 씩씩 뿜는 게 영락없이 도깨비 면상이로구나 하며 혼잣말하니, 휙 돌아서서는 거기 아무거나 던지지 말아 폭발해 폭발한다고 하며 으름장 놓았다. 나는 그렇습니까 하고서 미륵처럼 웃었다. 옷 주인 어깨 부르르하는 꼴이 너무 안 되어서 등짝에 나무아미타불 했더니 빙글 돌아 합장한다.





주황색 원 하나둘 늘어가니 마음도 운다. 누구 하나 죽거나 사는 결말일랑 원한 적 없는 거 보니, 당신 말대로 태어나길 악하게 태어나지 못했다. 나약함을 알아채고서부터 원인 모를 열감에 시달렸는데, 믿는 신이 없으니 굿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마저 망설여 늦어진 통에 웅크리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지만. 하릴없이 몸을 말고서 유명 배우가 돈이 궁할 때 찍었던 포르노 비디오처럼 스르르 사그라지길 희망하고 희망했다.





벚꽃이 담긴 봉지가 펑 소리 내며 터지니 허공에 샛노란 용암이 튀어 오른다. 장관이로다. 엄마가 꿨다던 태몽 속 금잉어가 이랬을까. 극락전과 이어지는 산책로가 정비 사업으로 망가지기 전엔 봄마다 벚꽃이 흐드러졌다. 길가엔 창신동서 떼온 장난감과 염주 파는 상인들하고, 일회용 젓가락에 솜사탕 돌돌 마는 수상쩍은 사람도 곧잘 늘어서서 사계절 내내 축젯날 같았다. 지금에는 이처럼 별 볼 일 없는 동네 뒷산 꼬락서니가 되어서 단풍 드는 몇 주 빼곤 찾는 이 불공드리는 노인들뿐이다. 

산의 정기를 막았다고 펄펄 뛰던 산 아랫마을 사람들과 아스팔트 독기가 나무를 죽였다는 젊은 이장 패거리로 나뉘어 대판 싸우기도 했는데, 정작 헛짓거리한 군청에서는 쌈 구경만 했지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다. 누가 찾아가 민원이라도 넣으려 치면 오래된 은행나무를 볼모로 잡고 지난 일은 잊고 남은 것들이나 잘 지키며 살자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생전 험한 말 입에 담지 않는 주지 스님도 천하의 쌍놈들이 따로 없다며 혀를 찼다.





내가 뭐하러 해괴망측한 짓거리 하고 있느냐면 재작년 초부터 봄날의 절간 풍경이 간절했던 탓이다. 정확지도 않은 기억 붙들고서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벚꽃 흐드러진 숲길이니 뭐니 주변에 떠들어댔고, 지금 보니 나지막해서 우스울 지경인 마룻길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는 허풍도 늘어놨다. 그리하여 올봄에 진해에 떨어진 벚꽃 왕창 쓸어 담아 냉장고에 넣어뒀다. 오늘 산 오를 때 봉투에 담긴 벚꽃 보며 저마다 신기해했는데, 낭만을 아는 가을 객들답게 벚꽃 비우고 낙엽 챙기시려나 묻는 이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서 쓰레기를 버리러 와서 또 담아가면 쓰겠습니까 하고 객쩍은 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옷 주인이 헛소리를 한 건 아닌 모양인지 불꽃이 요란한 소리 내며 높다랗게 솟구친다. 놀라서 뛰쳐나온 승니僧尼와 동자승, 절 체험한다며 주황색 옷 걸친 사람들까지 저마다 휴대폰 들고 찍기 바쁘다. 다행히 경찰서, 소방서에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우는 것들 속세라도 되는 양 다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른다. 동자승 두 놈 노루처럼 새카만 눈을 반짝이며 근처까지 바짝 왔는데, 얼굴 덴다며 비구니들에게 야단맞고 잡혀갔다.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동냥이든 포용이든 뜨뜻해서 좋다. 시주라고는 주머니에 먼지와 뒹굴던 동전 털어 넣은 게 고작이면서 이러고 있으려니 양심이 꿈틀댄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용암 한 사발 퍼다가 구경꾼들 마음에 킨츠키金継ぎ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몇몇 지나치게 가여워하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치기로 추잡한 기억들 태우는 일을 경건한 수행인양 여기니까 도망도 못 치게 되었다. 영락없이 다 태워야 하니 왠지 일이 된 거 같아 더는 흥도 나질 않고 몇 개는 버리기가 아깝다. 참으로 꼴사납다.





푸스스- 매가리 없이 사그라드는 미련 보고 있노니 눈물 한 방울 똑 흐른다. 구경꾼들 웬걸 덩달아 울어서 죽을 철 놓칠 패랭이꽃 위에 비가 똑똑똑 떨어진다. 미련과 빗물 만나면 어김없이 불꽃놀이로 화사하게 터진댔다. 펑펑- 정신없이 집어 던지다 보니 절절한 마음은 순애가 아니라 망가진 인간의 증명서일 뿐이라는 역겨운 구절 있는 시집 하나 남았다. 빌어먹을 놈팡이. 순수한 척은 다 해놓고서 자기 제자를 성추행했다지. 이놈 이야기 읽으며 위안받은 걸 생각하면 수치스러워서 속에 천불이 난다. 마음 같아서는 잡아다가 불구덩이에 던져 넣고 싶다만, 온 힘을 다해 용암의 옆구리에 처박고 욕지거리 뱉으니 그나마 속이 좀 낫다.





다 태웠으니 떠나야지. 필요한 건 마침표뿐이라 남아서 공양하고 천박하게 수다 떨며 아쉬워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산등성이서 내려온 찬 바람이 달은 마음을 덮는다. 사람들 어깨 부스스 떤다. 우리가 선 곳 극락정토라 하여도 자칫하면 이처럼 타죽는 일 있다. 그러니 다음번엔 잊지 말고 외투 속에 수영복을 입고 와야지.




단풍놀이_2023




            글 : 극락전에서 (극락정토라도 자칫하면 타버리는 일)          

            그림 : 단풍놀이          

            20231207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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