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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Aug 10. 2022

24화 조금 느리게, 천천히......(22일 차)

(2022.4.15.금)

*. 비야르 데 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산티바네스 데 발데 이글레시아스(Santibanez de Valdeiglesias) (20.0Km 800분 출발- 1330분 도착)            

 < 상세 일정 비야르 데 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 0.0km)→ 라스 마리아스(Las Marlilas 4.0km) → 비야반떼(Villavante 10.0km) → 뿌엔떼 데 오르비고(Puente de Orbigo 14.5km) →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15.0km) → 산 펠리즈 데 오르비고(San Feliz de Orbio 16.0km) →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Orbio 17.5km) → 산티바네스 데 발데 이글레시아스((Santibanez de Valdeiglesias 20.0km) >


< by 개미(옥이) >


  비야르 데 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의 알베르게에서는 50여 개의 침상이 있는 곳을 독채로 빌린 것처럼 아무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신경 쓸 일이 없어 편안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눈이 떠져 커튼을 젖히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미처 모습을 감추지 못한 달빛이 서편으로 채 지기 전에 동편에 서서히 밝아 오는 해가 신비하고 오묘합니다.     

 금방 빠져나올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제법 큰 마을입니다. 도로를 건너니 바로 광활한 밭이 나옵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 갈아엎은 밭, 수확을 끝내고 남아 있는 옥수수 밑동들, 유채꽃 같은 노란색으로 뒤덮인 밭, 거기에 간혹 초록의 밀밭이 보입니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팔렌시아 지방의 메세타 평원을 지나면서 보지 못한 풍경입니다. 순례자가 걸어가는 길에도 자주 트랙터 같은 농기구가 지나갑니다. 스페인은 워낙 땅이 넓어 손으로 경작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인지 농업에 필요한 농기계가 엄청 세분화되고 발달된 모습을 봅니다. 밭을 가는 기계나 씨를 뿌리는 기계가 거의 트랙터같이 크고 단단하게 생겼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린 아들 삼부자가 아직 갈아 놓지 않은 밭에 나와 땅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땅을, 농사를 그대로 물려주는 세 사람의 모습이 저 넓은 대지와 어우러져 한 편의 역사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있으니 론세스바예스로 넘어갈 때 만났던 스위스 청년 렌초가 걸어오고 있습니다. 까미노길 중반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사람들만을 봐오던 터에 만난 렌초는 형제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가 땅에 심을 작물에 대해 묻습니다. 해바라기를 심어 기름을 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곳은 우리가 지난 온 지방과 달리 땅에 물이 많아 옥수수며 해바라기 등이 잘 된다고 말을 합니다. 팔렌시아주까지 넓게 펼쳐졌던 초록의 밀밭이었던 것이 레온주로 넘어오면서 경작을 위해 갈아 놓고 씨앗을 뿌리지 않은 땅들이 곳곳에 많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답니다.

< 삼대....>

렌초가 “저들은 working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walking을 한다”며 한바탕 웃음을 주고 성큼성큼 앞질러 갑니다. 얼마나 빠른지 금세 멀어지더니, 점으로 변합니다.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며 푸엔떼 데 오르비고(Puente de orbigo)마을은 건너뛰고 다음 마을에서 쉬기로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마을까지 13.3Km를 쉼 없이 걸었습니다. 까미노 중반을 넘어서니 체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유난히 힘들어 하는 남편이 뒤에 쳐집니다. 오늘은 내가 페트루스가 되어 속도를 리드해 나갑니다. 망망대해 같은 초록의 평원에 남편과 나 두 사람만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곳에서 함께 걷는 사람과의 연대는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마을에는 오르비고 강을 가로지르는 멋진 중세 다리가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다리라고 합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모티브를 준 ’돈 수에로 기사의 이야기‘로 유명한 이 도시는 우아했고,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식당 이층 테라스에서 예닐곱 명이 식사를 하는데 ‘꼬레아노’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들려 올려다 보며 손을 흔드니 뒤쪽의 몇몇이 호응해 줍니다. 도대체 이곳에서 한국인의 인기는 시들지 않습니다. 마을 소개 현판의 사진을 보니 이곳에서 매년 옛 중세 기사들의 결투를 재현하는 축제가 열리나 봅니다. 몸도 힘들고 지친 터에 하룻밤 묵어갈까 하다 다시 기운을 내어 길을 재촉합니다.


 마을 큰 도로를 건너자마자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아이콘이 웃는 길과 찡그린 길이 나와 우리는 청개구리처럼 찡그린 아이콘을 선택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21일 차를 하며 순례자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봅니다. 밭 가운데 난 길을 조금 지나자 마자 고속도로 옆길로 이어집니다. 정오의 작열하는 햇살은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고, 자동차가 빈번하게 지나며 아스팔트와 부딪혀 내는 소음이 피로감을 더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지쳤습니다. 똑같은 배낭이건만 오늘 느끼는 무게는 거의 형벌 수준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마침 산티바네스 데 발레이글레시아(Santibanez de Valdeilesias) 마을이 보입니다. 무조건 발길이 그곳으로 향합니다. 간신히 알베르게에 숙소를 잡고 뜨거운 물 샤워를 합니다. 오래된 집인데 집안에 벚나무가 무성하여 꽃망울이 터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처음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한 오후를 보냅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알베르게 앞마당 뜰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성당 미사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이곳까지 들립니다. 알고 보니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받은 고난의 그 날을 기리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목표는 아스토르가(Astorga)의 성당에서 6시 반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는데 체력이 따라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회하니 지금의 이 특별한 상황을 만나고 있는 것이지요. 레온(Leon)에서 긴장이 좀 풀어진 탓일까요.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걱정입니다.

< 민들레의 위로 >

 후반의 초기에 겪는 위기 같은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듯도 합니다. 도로 곁으로 난 길에는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 힘겹게 걷는 저를 위로해 줍니다. 벌써 홀씨를 날릴 준비를 하는 꽃송이도 있습니다. 한 가지 아래에서 말입니다. 서로 다른 성장의 속도가 자연의 조화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워낙 체력이 좋고 다리가 긴 렌초는 생장에서 우리와 같은 날 출발해서 레온(Leon)에서 이틀을 묵고도 우리와 만났습니다. 렌초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다르고 나이 드신 영국 형제분들의 속도가 다 다른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머지않아 민들레 홀씨를 품게 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 알베르게 안 마당의 풍경 >

 알베르게의 안마당 벚나무 아래에서 맛있게 먹은 닭고기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먹어 볼 수 없는 맛과 양입니다. 함께 곁들인 와인과 너무 잘 어우러집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맨 줄에 널은 빨래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내일도 아스트로가(Astorga)까지 조금만 가렵니다. 대성당도 보고 가우디의 주교관 등 볼거리도 많은 곳이니까요. 일정이 좀 늦어지더라도 쉬어가며 목표한 곳까지는 가려고 합니다. 렌초는 무시아(묵시아)와 피스테레(피니스테레)까지 간다고 합니다. 혹시 저도 같이 가게 될지 모릅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요. 성당 미사에 참석은 못 하더라도 성금요일의 분위기는 느껴 보려 합니다. 오늘도 까미노 길 위의 작고 정겨운 마을에서 귀한 하루가 갑니다.




 < by 베짱이(일이) >


  어젯밤 로컬식당의 주인장 내외가 내어 준 노란색 독주와 그들의 주문대로 잠을 푹 잤다.  아침에 홀 가운데 공간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매일 하는 스트레칭은 내 몸에게 바치는 감사 의식이다. 오늘도 목적지까지 내 영혼을 온전히 데려다 주기를 기도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창 밖에는 아직 달이 남아 있고 반대편 창으로는 여명이 시작 된다.  또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열흘 더 걸으면 끝이 보이겠지. 내 몸과 영혼은 이미 좀 우울하고 자신감 떨어진 서울에서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매일 아침 회복의 기쁨을 느낀다. 마치 이 길이 영적 에너지를 준 듯 잠시 신비의 세계에 살짝 빠져 본다.

 아내에게는 걷는 일 보다 글로 정리해 카페에 올리는 일이 더 힘겨울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본인의 결정이니 두고 볼 일이고 끝까지 응원하고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길이 끝난 후에도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는 실전의 장이기도 해서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나는 지루하고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한다. 생경한 시간이 다시 익숙해지고 지루해질 때 쯤 다시 익숙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지루해지면 떠나고 다시 돌아 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익숙해졌던 곳을 떠나온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익숙한 장소를 새로운 상상력으로 변화시킨다. 시간의 어어짐과 관계의 속살을 보며 저 건너편에서 이 곳을 보고 다시 이 편에서 건너를 본다. 시간과 장소의 역학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행이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 공감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여행을 권하라 말한다. 아니 함께 여행을 떠나 보면 더 좋을 것이라고...

  걷기는 여행하는 여러 방법중 하나이다. 나는 걷는 것이 오래된 미래의 여행법이라 여기고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걷는 여행을 좋아한다. 은퇴의 축복은 바로 내가 어디든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긴 시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걷다 보면 강요된 속도의 시간 속에 놓친 것들이 새롭게 다가올 때가 많다. 마치 아주 작은 꽃잎에 눈을 가까이 대고 그 작은 우주의 오묘함에 경외를 보내며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하고 물을 수 있는 경험을 할 때처럼 내가 잊었던 동심과 순수한 감성을 발견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머리로만 알았던 진리의 가르침을 가슴에 받아 들고 전율하기도 한다. 조금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와 감각들도 살아 나고 말하지 않고도 대화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 지도 알게 된다.   산길을 걷든 강변이나 해변을 걷든 장소 불문하고 여행을 ‘걷기의 방법'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아내와 나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걸 알게 되고는 심각한 결심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같은 별이라 한들 어찌 다 같은 생각으로 살겠는가? 다른 점을 발견하고 이해해 가는 과정을 나는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 눈에 반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싹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싹을 틔우고 가꾸는 과정을 나는 사랑을 알고 배우는 과정이라 이르는 것이다.  

나는 여행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매개를 가지고 시간을 공유하며 내 아내와 내 아이들과 내 주변의 지인들과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내 아내와는 무수히 많은 여행을 다니며 사랑을 알고 배웠다. 그러면서 우리 둘만의 사랑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확장하는 사랑으로 키워오고 있다.

< 같은 색과 다른 색의 조화(?) >

  나는 이번 산티아고 순례 여행은 우리 부부의 은퇴 이후 삶의 방향과 구체적 방식과 내용을 배우는 귀한 전기가 될 것임을 예감한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에 무언가 얻기 위해 사람들은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다.  주어지는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고통은 단련과 시련의 과정이며 앎과 배움과 깨우침의 순간들을 준다. 불교의 소승과 대승의 방법론을 굳이 비교 않더라도 고통을 나누는 도반(道伴)들이 있을 때에  깨달음의 크기와 깊이는 더 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알베르게는 부녀가 운영하는 소박한 곳으로 이들의 푸근한 시골 인심과 포도주에 취해 마음이 한층 더 따뜻해 진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생경한 공간에서도 시간은 똑같이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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