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오(武雄) 코스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생긴 올레 코스다. 후쿠오카에서 JR 열차 또는 차로 1시간 거리인 사가현의 다케오(武雄)에 조성되어 있다. 이 도시는 사방을 에워싼 산속에 고요히 자리 잡은 오래된 온천 마을이고, 올레 시작점도 JR 다케오 온센역(JR 武雄 溫泉 驛)이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 다케오 온센역 2층이 올레 시작점>
마침 숙소가 역 근처라 호기롭게 출발지점으로 갔다. 그런데, 재래선 역 근처에 있다는 관광안내소가 보이지 않는다. 역의 위층, 아래층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다가, 구내 매점으로 들어가니 그곳에서 안내지를 주며 스탬프 찍는 위치를 알려준다.
명성에 비해 올레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모양인지 그 관리가 좀 허술해 보인다.
남쪽 역 광장으로 나가 도심을 가로지르며 앙상한 벚나무 가로수 둑길을 걷는다. 우회하지 않으면 금방 도착할 길인데 굳이 골목 구석구석을 돌게 하고, 아스팔트가 아닌 흙과 산길을 걷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궁금증이 풀린다. 파란색 화살표와 빨강 파랑의 리본이 가리키는 대로 걸으면 오랜 세월 이 길 위에 다져온 그들만의 삶의 숨결이 느껴진다. 걷는 자들에게만 보이고 느껴지는 긴 시간의 흔적이다.
마을을 지나 대나무가 울창한 시라이와 공원(白岩運動公園)을 지나며 운동하고 있는 노인분들과 인사를 나눈다.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키묘지(貴明寺)라는 절이 있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대나무 숲과 1500년 전의 고분 유적이 있다. 1574년에 세워진 오래된 절이다. 문이 꼭꼭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대신 일본식 정원과 지장보살 등 여러 보살상을 구경한다.
올레 안내지에 차 한잔 대접받는 곳이라 했는데, 차디찬 보온병과 빈 찻그릇만 있다. 겨울철, 지나는 길손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따뜻한 차를 보충하지 않은 듯하다.
< 키묘지(貴明寺)에 써있는 한글 문구 >
아쉬움을 달래며 출입문을 나서는데 바로 앞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앞에는 단아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풍경과 마주한다. 삶과 죽음이 한 공간 안에서 공존하는 이들의 삶에 대한 철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조성된 스페인 마을의 성당묘지에서 느낀 정서와 비슷하다.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둔다는 것은, 삶을 더 적극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면 어김없이 뒷산으로 오르게 하고, 마을과 숲을 번갈아 걷게 하며 크고 작은 신사와 절과 고분 등 지루하지 않게 볼거리를 아기자기하게 제공한다. 코스별로 지역의 지리 지형과 유적 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길을 살려낸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내 시라이와 산으로 오르려는데 한글로 된 안내 문구가 보인다.
'전망대에서는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왠지 뭔가를 알려 주려는 정보처럼 느껴져 크게 소리 내어 읽는다.
산의 입구가 시작되는 초입에는 어김없이 대나무 지팡이가 바구니에 담겨 있다. 오르려는 자에게 베푸는 친절이다.
< 이케노우치 호수에 비친 그림자 >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얼마쯤 걸어가니 산속에 호수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이케노우치 호수(池ノ内湖)에 산 그림자와 다리를 건너는 우리 둘의 그림자만이 아른거린다. 우리는 홍보 책자에 나와 있는 포즈를 취하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숲과 호수를 오롯이 즐긴다. 숲에서 풍겨 나오는 피톤치드의 기운 때문인지 상급자 코스라 하는 A 코스를 금방 올라 정상의 분기점에 도착한다.
생각보다 쉽게 올라온 이곳에서 입구 초반에 봤던 문구가 떠올라 무작정 직진하려는 남편과 이견이 생긴다. 길이 없다고 주장하는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남편은 기어이 전망대로 오르는 길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산속에 둘만 있는 상황에서 고집을 피울 수 없어 그 뒤를 쫓아가기는 하는데 영 분이 풀리지 않는다.
< 다케오 시내와 미후네야마 산 >
급한 경사길을 헉헉대며 십여 분 정도 오르니 다행히 전망대 표지판이 나온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왼쪽으로 솟은 미후네야마 산과 다케오 시내의 황홀한 풍경에 정신을 빼앗긴다. 덕분에 치솟았던 화가 좀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도 잠시!
표지판에 쓰여 있었던 충고대로 길이 없으니 되돌아가자는 나의 의견과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남편의 의견이 또 부딪힌다. 결국 그대로 직진하는 남편의 고집에 밀려 뒤따라가는데 길이 거의 암벽등반 수준이다. 꽤 깊고 가파르고 골이 깊다.
다시 속에서 분이 끓어오른다. 간신히 억누르며 그 뒤를 따라 한참을 내려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오를 때 초입에 있었던 사가 현립 우주 과학관의 지붕이 보인다.
아뿔싸! 우리는 원점 회귀, 한 바퀴를 돌아 길을 잃은 것이다.
남편은 사색이 되어 되돌아가자고 소리치는 나를 보며 ‘쯧쯧’ 혀를 차더니 그대로 앞으로 직진한다.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래, 어찌 되는지 두고 보자.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심정으로 터덜터덜 뒤쫓아 가는데, 저 멀리 파란색 올레 간세가 보이고 출구가 나온다.
" You win "
엄지척으로 멋쩍음을 대신한다.
순방향으로 되어 있는 길은 이제 시내로 향한다. 붉은색 벽돌로 잘 지어진 문화회관 앞마당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선정되었다는 다케오 시립 도서관에 도착한다.
실내는 벽으로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앞쪽은 1층 높이로 스타벅스 카페와 츠타야 서점 그리고 빼곡히 책이 꽂힌 서가가 둘러 있다. 뒷면은 3층 높이로 뒤쪽에서 앞쪽으로 천장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그중에서도 도서관 앞면의 큰 통 유리창은 어디에 앉아도 초록의 정원이 훤히 보이고 골고루 햇살을 받게 한다.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넓고 높은 내부 공간 설계 덕인지 모든 소음을 흡수해 버린 듯 고요와 정적만이 흐른다.
도서관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도 있고,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자유롭게 책을 꺼내다가 쌓아 놓고 볼 수 있는 커피 전문점과 책방이 한 공간에 있는 도서관이라니 참 신기하기도 하다.
우리도 덕분에 다리품도 쉬고, 바람 부는 야외 광장에서 먹은 점심의 한기도 녹일 겸 따끈한 커피 한잔을 놓고 현지인처럼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는 여유를 가져 본다.
걷는 것은 시간이 오롯이 내 안으로 들어 오는 신비한 경험의 과정이다. 걷다가 그저 마음이 가는 곳에서 단 몇 분이라도 언제든 머무를 수 있다.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를 만끽 할 수 있는 것이 걷는 여행이 주는 작은 보물이다.
오후로 접어들며 해가 서서히 내려앉을 무렵 다시 길을 떠난다.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속도를 내어 걷다가 수령 3,000년 된 녹나무가 있는 다케오 신사에서 걸음을 멈춘다. 독특하게도 신사 참배소 바로 앞에 소원지로 가득 장식된 아치형 간이 출입구가 세워져 있다. 현지인들이 참배하기 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번씩 돌고 난 후 합장을 하고 들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참배하기 전 속세의 번뇌와 때를 씻어내는 의식인 듯싶다. 잠시 망설이다 나도 그들처럼 따라 해본다.
< 3,000년이 넘은 녹나무 >
신사 참배소를 지나 녹나무를 보러 걸음을 옮긴다. 신사 뒤편의 울창한 숲길을 조금 걸어 올라 가야 한다. 땅거미가 내려 어둑해진 숲길에 까마귀 떼들이 저음의 울음을 뱉어내며 녹나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같은 자리에서 천년의 세월을 세 바퀴나 돌며 다녀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이 거대한 녹나무의 신비로운 기운에 온 몸이 오싹하다. 더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는 남편을, 녹나무의 정령들을 노하게 할 것 같아 얼른 제지한다.
바릴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올레의 간세는 넓은 길을 놓아두고 다시 인적 없는 어둑한 숲길로 향하게 한다. 여전히 까마귀 소리를 배경으로 이천년이 넘은 쓰카사키의 녹나무가 서 있는 곳에 이른다. 다케오 길의 마무리는 수천 년 세월을 머금은 녹나무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저녁 먹고 산책 나온 꼬마들이 긴 세월의 흐름을 이어갈 생명의 기운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까마귀 소리를 대신해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무겁고 으스스했던 마음을 따뜻하게 가라앉혀 준다.
산길을 벗어나 시내로 접어든다. 시청을 지나 나가사키 가도(中崎街道)로 접어든다. 이 길은 에도 시대 쇄국 정책으로 유일하게 나가사키로 들어오던 서양 문물이 교토, 에도(당시 동경)로 보내지던 루트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이곳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숙소도 많이 지어졌다. 당시 건축된 고풍스러운 집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천천히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다케오 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사쿠라야마 공원(桜山公園)과 다케오 온천(武雄温泉)으로 향한다. 이미 날이 저물어 그 아름답다는 공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1,200년 역사를 가진 오라이 산기슭의 기암괴석이 묻힌 땅속에서 솟아올랐던 용암을 상징하는 온천장 ‘사쿠라몬(로몬)’의 빨간 대문을 만난다.
어둠 속에서도 그 선명함이 도드라져 더욱 당당해 보인다. 용궁성의 모양을 본뜬 대문은 1915년 건축가 다쓰노 긴고에 의해 만들어지고,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올레 다케오 코스의 마지막 종착역이기도 하여 인증사진을 찍으며 그 분위기에 젖는다.
온종일을 걸었다. 다케오 코스는 제법 길고 힘이 들긴 했지만 다체로운 볼거리가 많아 걷기 좋은 코스다. 벚꽃이 활짝 피는 따뜻한 봄날에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그때는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천천히 걸으며 꽃구경도 하고, 골목 골목을 누비며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누고, 뜨거운 다케오 온천에 몸을 담가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