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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i stroll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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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May 22. 2024

'맡겨진 아이'를 읽고...


책에서 생각지 못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있다. 빠르게 읽어나간 이 책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책 속의 주인공은 엄마의 출산까지 몇 달간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진다. 맡겨진 아이가 느끼는 주요한 감정은 불안과 긴장이다. '이쯤에서 거친 말이 오겠지', '이쯤에서 차가운 반응이 올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아이는 다음 상황을 준비한다. 하지만 낯선 부부는 편안하고도 다정하게 아이를 대한다. 




아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나에겐 낯설지 않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느꼈던 감정이다. 기부할 옷 두 벌을 두고 애인과 실랑이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뱉자마자 한 생각은 '여기서 애인이 짜증을 내겠지'였다. "됐다. 그냥 하지 말자! 갖다 치워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야~"라는 애교스럽고 다정한 말이었다. 내 안에 울렸던 목소리는 애인의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두 가지였다. "이걸 하고 싶다", 그리고 "혼나지 않으려면 해야한다" 전자는 나의 심지가 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 그리고 후자는 24시간 나를 흔들어 어느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어린 시절은 4살 무렵이다. 아직 동생이 태어나기 전, 안방에서 부모님과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고 자던 시절. 잠에서 깨어보니 아빠는 화가 나 있고 엄마는 울고 있었다. 바위처럼 강하고 자존심이 센 엄마는 "엄마 왜 울어?"라고 묻는 나를 급히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빠는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 강도와 양상은 변했지만, '화'는 아빠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었다. 어떤 때는 짜증으로 어떤 때는 냉담으로, 또 어떤 때는 극단적인 슬픔으로 나타났지만 모습을 달리한다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아빠를 마주할 때 나의 감정은 한결같았다. 나는 불안했다. 


우리 가족은 늘 집에서 서비스모드였다. 가족에게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제1행복이라 믿는 아빠는 누구보다 우수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지켜진다면. 조건은 아빠가 세운 매뉴얼대로 모두가 행동하는 것이었다. 의성 읍내에서도 차를 타고 30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산골 동네에서 태어난 아빠는 1시간씩 산을 타넘으며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6남매와 부모님,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았던 그 집에 질서란 없었다. 물건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물건의 소유는 불분명했다. 오로지 가부장제라는 대원칙만이 간신히 집을 지탱하고 있었다. 일본에 사는 친척 어른이 찾아 온 어느 날, 짐 푸는 것을 돕던 아빠는 그렇게 하얀 수건을 처음 봤다. 그리고 그 날부터 아빠는 깨끗하고 질서 있는 집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꿈은 어린 아빠가 장날만을 기다리게 만들었고, 도시에 대한 동경을 키우게 했으며, 훗날 그를 호텔에서 일하도록 이끌었다. 그 꿈은 아빠를 아빠로 만드는 심지였다. 그래서 아빠의 조건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건은 단 하나 뿐이었지만, 그걸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엄마를 그대로 빼어닮은 나와 동생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빠는 "주문하신 코스요리 나왔습니다~" 라는 말을 다정한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환호 서비스가 없다면 언제든 들고 있던 집게를 싱크대에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코스요리를 준비하지도 않지만 집게를 내던지지도 않는 엄마의 방식이 나는 더 좋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엄마 또한 아빠의 관객이었으므로. 


나는 손톱을 물어 뜯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내 손톱은 짧았다. 어느 순간 손은 개구리발같은 모양으로 자리 잡았고, 나는 그걸 귀엽다고 생각했다. 23살의 어느 여름 날 나는 이런 내 손을 나만큼이나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 나는 손을 물어 뜯었다. 질투와 서운함을 나눴다. 나는 손을 물어 뜯었다. 함께 이사를 했고 나는 손을 물어 뜯었다. 같이 살며 전에 없이 싸우는 날들이 이어질 때도? 당연히 손을 물어 뜯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과 온기가 나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손을 물어 뜯었다.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와 무관하게 나는 손을 물어 뜯었다. 그건 그냥 내가 하는 일이었다. 


"내 생각에 병원을 한 번 가 보는 게 좋겠어" 어느 날 애인이 내 손을 들여다보다 말했다. 

"왜?"

"손을 너무 많이 뜯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에게 연락해서 한 번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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