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자’라는 뜻의 별명을 가진 포이보스 헬리오스는 낮에는 태양 마차를 끌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신이다. 훗날 그는 태양신의 지위를 아폴론에게 넘겨주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태양 마차는 헬리오스가 직접 몰았다.
고대 이집트, 곧 아이깁토스에는 태양의 도시라는 뜻의 헬리오폴리스가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도 어린 시절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클리메네라는 여성이 살고 있었고, 밤이 되면 헬리오스는 그녀에게 내려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후 클리메네는 메로프스라는 남성과 혼인하지만 열 달이 차지 않아 아이를 낳는다. 이에 그녀는 과거를 고백하고 아이에게 ‘빛나는 자’라는 뜻의 이름, 파에톤을 붙여준다.
열여섯 살이 된 파에톤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 때문에 조롱을 당한다. 어머니에게 항의하자 클리메네는 그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파에톤은 이를 친구들에게 말하지만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몰리며 더 큰 놀림을 받는다. 결국 그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동쪽 에티오피아를 향해 떠난다.
헬리오스를 만난 파에톤. 신기하게도 헬리오스는 그를 단번에 아들로 알아본다. 파에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헬리오스는 스틱스 강에 맹세하며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스틱스 강의 맹세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조차 일단 맹세하면 절대 거둘 수 없는 약속이 된다. 파에톤은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하지만 헬리오스는 이 소원을 거두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양 마차를 모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에톤은 끝내 고집을 부리고 마차에 오른다.
헬리오스는 마지막까지 만류하며 유의사항을 자세히 설명하지만 결국 파에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마차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자마자 문제가 생기고, 말들은 익숙하지 않은 무게에 날뛰기 시작한다. 파에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별자리를 넘나들며 그들의 공격을 받고, 마차의 고도를 조절하지 못해 지상의 강, 바다, 산, 땅까지 모두 불타버리게 된다.
신들의 아우성 끝에 제우스는 번개를 던져 파에톤을 떨어뜨리고, 그는 추락해 죽고 만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무덤 앞에서 슬픔에 잠긴 채 눈물을 흘린다. 그러던 중 누이들은 점차 포플러 나무로 변하고, 그들의 눈물은 보석 ‘호박’이 된다. 호박은 보석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나무의 수지가 화석화된 것으로, 이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자연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는 파에톤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유형의 비극 서사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도전했으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 이야기로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진시황의 영생 탐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불가능한 욕망에 도전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현대적으로는 기술 문명과 우주 확장에 도전하다 파국에 이르는 SF 작품들이 이러한 모티브를 잇는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이야기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박사,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그리고 그리스 신화 속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객관적 판단 없이 욕망과 과신으로 도전하다가 실패를 겪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작품들은 객관적 기준을 잃은 도전은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음악에서도 이 이야기는 큰 영감을 주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샤를 생상, 프란츠 리스트는 각각 파에톤이라는 제목의 곡을 작곡했다. 이 중 샤를 생상의 작품은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스토리를 떠올리며 감상하면 더욱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꼭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
파에톤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고와 죽음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한 소년의 간절함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름을 조롱받았고, 진짜 아버지를 찾아 나섰으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 증명은 결국 파괴와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 서사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때로는 위험한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운전하겠다는 파에톤의 소원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싶다는 열망의 발로였다. 신화는 이러한 시도를 무모한 욕망으로 해석하며, 결국 세상 전체를 불태우는 대가로 되돌려준다. 욕망은 자기 인식 없이 발현될 때 신화 속에선 세상을 태웠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불꽃이 된다. 파에톤은 그저 존재를 확인받고자 했지만 그 도전은 신들의 개입을 불러온 혼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이러한 서사는 파에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대 신화 속 수많은 인물들 역시 욕망과 자만 혹은 존재의 증명을 위해 신의 권역을 넘보았고, 그 대가로 추락하거나 형벌을 받았다. 이카로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바다에 떨어져 죽었고,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포스산에 오르려다 제우스의 진노로 추락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신의 불을 훔쳐 영원한 형벌을 받았으며, 니오베는 자식의 수를 자랑하며 레아를 무시하다 신의 분노를 사 돌이 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넘어선 세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초래한 비극의 전형들이다.
이러한 도전과 파멸의 이야기는 비단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양의 신화에서도 유사한 구조는 반복된다. 중국 신화의 공공은 분노에 휘둘려 하늘을 무너뜨렸고,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의 라바나는 오만으로 신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다 파멸을 맞는다.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는 무질서한 행동으로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숨게 만들어 세계를 어둠 속에 빠뜨렸으며, 몽골 신화의 에르헨 남은 하늘의 해와 달을 쏘아 우주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들은 모두 신의 권역 혹은 세계 질서에 도전하거나, 무지로 인해 그것을 파괴한 존재들이다. 결국 신화 속에서 그들의 도전은 신들의 개입 혹은 파멸을 통해 종결되며, 질서는 다시 회복된다. 파에톤과 마찬가지로, 인간 혹은 반신적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거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 신화는 질서의 붕괴에 대한 대가라는 응답으로 되돌려준다.
파에톤의 비극은 개인적 죽음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불균형을 낳았다. 하지만 신화는 이러한 균형의 파괴를 마냥 허무로 끝맺지 않는다. 제우스의 개입은 신의 분노이자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하며 결국 세상을 정상 상태로 되돌린다. 이는 고대 신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파괴 이후의 정화라는 구조와 연결되며, 인간 사회에서도 이를 수습하려는 의례와 신전에의 제사가 뒤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화는 질서를 파괴한 자를 벌하는 하나의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안정성과 신적 권위를 동시에 회복하는 결과를 취한다.
그러나 신화는 단지 그 파괴만을 말하지 않는다. 파에톤의 누이들이 나무로, 그녀들의 눈물이 호박으로 변한 서사는 슬픔이 자연 속에 스며드는 순간을 보여준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보석처럼 세계에 남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 내에서도 다프네(월계수), 키아니(강), 히아킨토스(히아신스), 나르키소스(수선화)처럼 슬픔과 변화가 자연으로 스며드는 서사는 반복된다. 마치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이행하겠다는 양.
이와 유사한 전통은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 신화에서는 여신 사티가 고통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뒤 불사의 존재로 부활하며, 슬라브 신화의 바르바라는 절망 속에서 백조로 변한다. 아프리카 앙골라 신화에서도 자녀의 죽음을 슬퍼한 어머니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며, 슬픔을 새로운 생명의 흐름으로 전환시킨다.
감정이 자연물로 바뀌는 서사는 단순한 장면 전환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는다는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슬픔은 흐르는 눈물이 되어 강이 되고, 절망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며, 사랑은 나무나 꽃처럼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전환은 감정을 단지 순간적인 감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세계에 새겨지는 흔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며, 그 속에서 신화는 감정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한 형태의 언어가 된다.
신화는 그렇게 말한다. 감정은 세상을 이루는 또 다른 질서이며, 보이지 않는 슬픔조차 자연 속에 응결되어 우리 곁에 머문다고.
이야기 속 에티오피아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마주치는 상징적 공간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투영된 뜨거운 경계이며, 파에톤이 달리는 길은 곧 그 갈망이 불러일으킨 도전의 궤적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신화 구조는 인간이 욕망과 질서, 존재 증명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 왔음을 보여준다. 파에톤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넘어 인간 조건에 내재된 보편적 딜레마를 드러내는 상징적 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