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신을 먹은 에리시크톤

by 야담

신화 이야기




에리시크톤은 땅의 보호자라는 뜻의 이름을 지녔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연을 파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데메테르 신전이 있는 엘레우시스 땅에 살고 있었고, 어느 날 도끼를 들고 신전 안에 있는 신성한 나무를 베려한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고 결국 나무를 쓰러뜨렸다. 이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요정 하마드리아데스가 깃든 신성한 나무였다.



분노한 요정들은 데메테르 여신에게 달려가 에리시크톤을 벌해달라고 간청했고 데메테르는 배고픔의 여신 리모스에게 그를 최대한 괴롭혀 달라고 부탁한다. 리모스는 꿈의 신 모르페우스와 잠의 신 히프노스의 도움을 받아 에리시크톤의 꿈속에 들어가 끝없는 허기라는 저주를 새긴다.



깨어난 에리시크톤은 배고픔에 미쳐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심지어 자신의 딸 아드메티나(메스트라)마저 팔아넘긴다. 하지만 그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변신 능력을 얻는다. 그녀는 새, 물고기, 말, 남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도망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또 팔리고, 그렇게 계절처럼 반복되었다. 마지막에는 먼 나라 왕비가 되어 다시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게 된다.



결국 에리시크톤은 허기를 견디지 못해 자신의 팔과 엉덩이를 먹고, 마지막에는 입술마저 먹어 치우다가 결국 이빨 한 짝만 남은 채 사라지고 만다. 그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며 끝없는 탐욕의 대가를 치른다.




신화와 문학




에리시크톤의 이야기는 인간의 탐욕과 자가파괴라는 강렬한 상징으로,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재해석되었다. 이 신화적 구조는 여러 문학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끝없는 욕망이 자기를 파괴하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서사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은 지식과 쾌락을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하고 결국 영혼을 잃는다. 안나 카레니나는 도덕과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채 사랑을 좇았지만, 결국 그 사랑에 파묻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들 모두는 더 많은 것을 원했지만, 그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멸한다는 점에서 에리시크톤과 닮아 있다.



두 번째는, 오만한 도전과 신성에 대한 무시가 파국을 불러오는 서사다. 돈 조반니는 여성을 탐하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살아온 귀족이 석상의 손님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야기로, 에리시크톤이 신성한 나무를 베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과정과 맞닿는다.



또한 메스트라의 반복되는 변신과 탈출은 고전소설 숙향전과 연결된다. 전생의 죗값으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 고난을 겪지만 결국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숙향의 여정은 팔리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신이 부여한 능력으로 자신을 지켜낸 메스트라와 닮아 있다.



이러한 서사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한계, 신성에 대한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다루며 에리시크톤 신화의 현대적 변주라고도 할 수 있다.




고찰




에리시크톤은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엔 자기 자신을 먹는 존재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땅의 보호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 모순적인 조합은 단지 우스운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어떤 책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되묻게 한다. 그는 정말 땅을 보호할 수 있었던 존재였을까 아니면 그 이름은 그가 결코 다다르지 못한 정체성의 이상형이었을까. 어쩌면 그 이름은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기회이자 본분을 잊지 말라는 상징적인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베어낸 나무는 그저 커다란 식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우스와 데메테르를 상징하는 참나무였고 곧 신의 질서 그 자체였다. 에리시크톤은 나무를 자름으로써 자연과 신의 연결 고리를 끊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도끼질이 아니었다. 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간의 자의식이었고 생명을 신의 것이 아닌 자원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그에 대한 벌은 육체를 먹는 끝없는 허기로 돌아왔다. 그의 식사의 순서인 팔, 엉덩이, 입술은 마치 인간의 노동, 생존, 그리고 말(소통)이라는 기능이 하나씩 무너져가는 순서를 보여주는 듯하다. 배고픔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해체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 뒤편에는 리모스라는 존재가 있다. 그는 단순히 허기의 신이 아니다. 리모스는 결핍 그 자체이며, 죽음이 오기 전에 먼저 도착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타나토스가 죽음이라면 리모스는 그 죽음이 피어나는 냄새다. 그는 허기를 퍼뜨리고 생존을 불허하며, 조용하고도 서서히 존재를 분해시킨다. 단숨에 삶을 끊지 않고, 서서히, 하지만 끈질기게. 그것이 리모스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에리시크톤 이후 리모스는 어디로 갔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리모스는 누군가에게 내려지는 벌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 속 균열을 감지하고 그 틈을 파고드는 존재였다면? 그는 결핍이 시작되는 곳마다 흘러들며 신들이 조율하지 못한 공간에서 조용히 자리 잡는다. 그의 등장은 자연스러웠고 그의 사라짐은 더디며 때로는 인간 스스로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처음 그는 북쪽의 추운 땅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언젠가 남쪽을 향했고 결국 아프리카라는 땅에 도착했다. 물론 이건 신화적 상상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한때 풍요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기근과 결핍을 상징하는 대륙으로 종종 언급된다. 리모스가 그곳에 도달한 이유는 어떤 단죄 때문이 아니라 나눠지지 않는 풍요의 왜곡된 구조를 감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핍은 없어서가 아니라 막혀 있어서 생긴다. 그렇게 리모스는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굶주림을 감지하며 가시화되지 않는 허기의 근원을 향해 스며든다.



그 순간 데메테르와 하데스가 떠오른다. 데메테르는 생명과 곡물의 여신이며 풍요를 조율하는 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세상의 균형이 무너질 때 허기를 퍼뜨릴 수 있는 존재다. 하데스는 죽음의 신이자 동시에 지하자원의 신이다. 그는 땅 아래 숨겨진 자원의 흐름을 쥐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 탐욕과 결핍의 한가운데에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만약 이 두 신이 각각 지상과 지하의 흐름을 관리하고 리모스가 그 틈에서 결핍을 퍼뜨린다면 어떨까? 그들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는 삼각 구조일 수도 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조율하면서 의도치 않게 인간의 세계에 균형과 붕괴를 동시에 선사한다.



아프리카는 그렇게 풍요와 결핍,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가 교차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리모스는 그곳에서 나눠지지 않는 자원을 감지하고 하데스는 그 무게를 감당하며 데메테르는 다시 균형을 맞추려 한다. 그리고 이 구도 속에서 인간은 단지 관찰자가 아니라 균열을 확대할 수도 복원할 수도 있는 존재다. 결국 문제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리모스는 단지 그 균열을 먼저 감지하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는 순간 이미 질문은 던져져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결핍을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먹는 에리시크톤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렇다면 데메테르는 리모스를 통해 세상에 기근을 퍼뜨리기만 했을까? 균형을 중시하는 신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축복도 함께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아프리카는 지금도 지하자원의 보고다. 풍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땅 아래로 숨겨졌는지도 모른다. 하데스가 지하자원의 신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데메테르가 허기의 대가로 그에게 자원을 내어준 것처럼 보인다. 즉, 아프리카는 신들이 남긴 절묘한 교환의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자원이 모두에게 나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곳은 여전히 결핍의 땅으로 남는다. 결국 리모스는 결핍의 전령이 아니라 나눠지지 않은 축복을 감지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결론




에리시크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먹는다. 자신의 집을, 자신의 땅을, 자신의 딸을, 그리고 결국 자신의 몸을 먹는다. 결국 남은 건 그를 파괴하던 도구인 이빨 한 짝뿐이다. 그는 환경 파괴의 은유이자 무한한 소비의 상징이다. 신화 속에서 벌로 주어진 허기는 곧 현대 사회의 욕망이기도 하다. 무엇을 더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우리가 끝없이 소비하고 욕망하는 지금 우리 안에 에리시크톤은 없을까?



신화는 인간에게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거울 같은 존재다. 에리시크톤의 이야기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 안의 허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은 단지 신화를 읽는 이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뭔가를 소비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이 신화가 오래전 이야기인데도 오늘날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끝없이 허기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keyword
이전 06화하늘을 달린 소년, 파에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