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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 하데스와 조력자들

by 야담

신화 이야기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지하 세계와 생명, 죽음, 그리고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는 핵심 신화 중 하나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기간토마키아, 즉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들 간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신들은 살아남은 기간테스를 산이나 바위로 눌러놓거나 무한한 감옥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그러나 깔린 채 꿈틀대는 기간테스의 몸짓은 지진이 되었고 뜨거운 숨결은 화산이 되었다. 가장 크게 놀란 신은 하데스였다.



지하의 균형이 흔들리면 지상의 빛이 지하로 흘러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는 지상의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올라온다. 평소 같았으면 투명 인간이 되는 투구 퀴네에를 썼겠지만 이날만큼은 착용하지 않았다. 하데스를 좋아하지 않는 아프로디테는 이때를 노린다. 그녀는 아들 에로스에게 일부러 하데스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며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언급한다. 에로스는 금화살을 하데스에게 쏘았고 화살에 맞은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해 지하 세계로 데려간다.



딸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모든 생명을 저주하고 자연의 순환을 멈춰버린다. 대지는 메말라가고 생명은 죽어갔다. 그러자 샘의 요정 아레투사는 참지 못하고 진실을 고백한다. 범인은 지하의 신 하데스였다고.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찾아가 딸을 돌려달라 호소하고 제우스는 처음에는 설득을 시도한다. 그러나 데메테르가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 제우스는 조건을 단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면 그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지하로 가서 이를 전하자 하데스는 재빨리 석류 한 알을 페르세포네에게 먹인다.



이로 인해 페르세포네는 완전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제우스는 타협점을 제시한다.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6개월은 지하에서, 나머지 6개월은 지상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계절의 순환이 생겼다고 한다. 페르세포네의 이름에도 상징이 숨어 있다. 페르세는 썩다, 죽이다 등 파괴의 의미를, 포네는 빛을 의미한다. 이름 자체에 죽음과 생명의 대조가 공존하는 셈이다. 그녀는 아버지 제우스로부터 권력과 변화를, 어머니 데메테르로부터 생명과 부활의 힘을 물려받아 죽음과 재생, 자연의 순환을 담당하는 신이 되었다.





신화와 문학





이 신화는 단순히 사랑 이야기나 납치극에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자연과 시간, 감정과 삶의 흐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인상적인 구조 중 하나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대칭 구조다. 이는 수많은 문학과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차용되어왔다. 예를 들어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하얀 마녀는 겨울을 영원히 지속시킨다. 이는 페르세포네가 지하에 머무는 동안 생명이 정지된 땅과 닮았다. 애니메이션 코코 역시 죽은 자의 세계를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는 구조로 지하 세계와 재생이라는 테마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저승의 다섯 강 역시 문학적 상징의 보물창고다. 망자들이 건넌다는 스틱스 강은 맹세와 관련된 상징으로 신들은 이 강에 걸고 맹세하면 절대 어길 수 없었다. 망각의 강 레테는 기억의 지움을 상징하며 이 강을 건넌 영혼은 전생을 잊는다. 비통의 강 아케론, 시름의 강 코퀴토스, 불의 강 플레게톤은 각각 죽음에 얽힌 인간의 감정들을 표상한다. 이들 감정은 고전문학뿐 아니라 현대 영화 속 복수극이나 심리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아케론과 레테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은 배신과 감옥에서 고통을 견디고 복수를 완수한 후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망각 속으로 들어간다.





고찰





그리스 신화의 초기 구조는 모계 중심에 가까웠다. 가이아는 최초의 신이자 대지 그 자체로 누구의 아내나 딸이 아닌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우라노스를 낳고 우라노스와의 결합을 통해 다른 신들을 창조해냈다. 가이아의 창조는 제도적 관계나 명명된 결혼 없이 이루어진 완전히 자율적인 생명이었다. 이후 크로노스와 레아의 세대 역시 결혼이라는 명칭보다는 모성과 부성의 역할로 규정되었다. 이 시기의 신화에서 여성 신들은 생명을 창조하고 순환시키는 주체였고 남성 신들은 예언을 두려워하거나 자식을 삼키는 등 오히려 생명의 흐름을 억제하거나 파괴하는 존재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 같은 전쟁을 거치면서 신들의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전쟁들은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라 신화적 세계의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초기 신화에서 신과 괴물, 신과 인간의 경계가 희미했다면 이 전쟁을 기점으로 신들의 계보와 역할은 명확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자연스럽고 개방적인 생명력의 흐름이 제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신들의 세계는 생명과 감정, 창조의 힘을 일정한 규칙과 제도 속에 넣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전환은 물리학적 개념으로 치면 무한정 확산되는 엔트로피를 질서로 되돌리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 질서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이 헤라이다. 헤라는 제우스와의 관계를 통해 최초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신화에 도입하며 관계의 형태를 감정이 아닌 제도 중심으로 재편한다. 헤라 이후 신화 속 관계들은 일정한 명칭과 틀을 갖게 된다. 사랑은 결혼으로 정당화되고 자식은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정통성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이전까지 감정과 창조가 자연적인 흐름이었다면 이제는 규칙에 맞는 방식으로만 허용된다.



이로 인해 생명력은 자유롭게 흐르지 않고 정해진 틀 안에서 반복되는 구조로 전환된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감정의 위치 또한 변화하게 된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역할은 감정의 자유로움을 상징하기보다는 감정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유도하고 조작하는 존재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들이 그러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로디테는 질서 이전의 존재로 우라노스의 거세라는 무질서 속에서 탄생했고 누구의 아내도, 딸도 아닌 상태로 신화에 등장했다. 그녀는 제우스에 의해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게 되지만 이를 수용하지 않고 아레스와의 자유로운 사랑을 유지하며 제도화된 관계를 거부했다. 아프로디테는 처음에는 제도의 밖에 존재했으나 점차 감정이라는 힘을 통해 질서에 개입하게 된다.



감정이 통제될 때 더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갖게 된다는 구조 속에서 그녀는 감정의 유도자이자 통제자로서 체제 안에 재배치된다. 이는 자유를 포기했다기보다는 감정을 통해 질서를 뒤흔드는 방식으로 활동을 전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에로스 역시 감정을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을 발생시키는 구조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감정의 질서화는 관계의 제도화와 함께 여성 신들의 위치를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생명을 다루는 주체였던 여성 신들이 이제는 결혼과 가족 제도 속에서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페르세포네는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생명과 죽음의 이중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며 자연의 순환을 상징하는 주체였으나 하데스에 의해 납치된 후에는 제우스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6개월은 지하에서, 6개월은 지상에서 머물게 되는 존재로 역할이 변경된다.



이러한 설정은 신화 속 여성 주체가 남성 신들의 합의에 따라 분할되고 재배치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남성 신들이 여성 신들을 통제하려 했던 이유는 단순한 권력 확보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신들이 가진 생명 창조의 능력과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본질적 힘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파괴적일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힘들을 일정한 구조 안에 넣어야 했고 그 구조 안에서 생명은 허용되되 통제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신화 속 질서의 전환은 감정과 생명을 다루는 여성의 힘이 남성 신들에 의해 제도 속으로 포섭되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신들의 세계에서 부계 중심의 구조가 확립된 것은 엔트로피적 혼돈을 억제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질서는 감정의 통제와 관계의 제도화, 생명의 규칙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성 신들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그 힘을 관리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려는 남성 신들의 판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그저 고대의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자연 속에서, 문학 속에서, 인간의 감정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이 신화를 통해 우리는 봄과 겨울이 단순한 계절의 흐름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이 맞닿는 순간의 반복임을 깨닫는다.



또한 이 신화는 완전한 회복은 없지만 순환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 기다림이 괴롭지만 의미 있는 이유, 그리고 우리 안의 감정이 저승의 강들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고대 신화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혜임을 보여준다. 공부하면 할수록 생각이 확장되는 신화. 그 속에서 우리는 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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