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시케 : 공주 동화의 원형
우리는 이 장면을 얼마나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방추에 찔려 잠에 빠진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남성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 스스로는 깨어날 수 없는 공주,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외부의 구원. 이 반복되는 장면은 단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신화에서 유래한 오랜 이야기 구조다.
고대 로마의 작가 아풀레이우스는 황금 당나귀라는 작품에서 사랑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에로스와 프시케. 이 신화는 그저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조건, 여성의 위치, 감정의 역할에 대한 전형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구조는 이후의 수많은 문학과 동화로 이어진다.
프시케는 인간이면서도 여신보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는다. 여신은 아들 에로스에게 그녀를 벌하라고 명령하지만, 에로스는 프시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금화살에 찔려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매일 밤 프시케를 찾아오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은 철저히 비가시적이며, 유일한 조건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프시케는 점점 그 정체에 의문을 품는다. 결국 언니들의 부추김에 따라 몰래 촛불을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사랑은 깨진다. 에로스는 떠나고 프시케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후 프시케는 에로스를 되찾기 위해 신들의 과제를 수행한다. 곡식을 분류하고, 검은 물을 길어오고, 금양털을 모은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로 내려가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받아 오지만, 끝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리고 상자 안의 어둠에 휩싸여 깊은 잠에 빠진다. 여기서 잠든 프시케를 다시 깨우는 것은 에로스의 키스다. 그 순간 프시케는 살아나고 두 사람은 신들의 허락 아래 결혼하게 된다. 사랑은 완성되지만, 프시케는 언제나 서사의 중심에서 배제된다. 그녀가 깨어 있는 동안은 고통뿐이었고 사랑은 잠든 이후에야 완성되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는 오랜 세월 문학 속에 다양한 얼굴로 반복되었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제인은 정체를 숨긴 로체스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 진실을 마주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 시작되었고 진실을 직면한 뒤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반복된다. 이름조차 없는 나는 매혹적인 남자 맥심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 뒤에는 죽은 전처 레베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고 진실은 침묵 속에 감춰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과거를 마주하고 그 어두운 진실을 통과해야만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또한 프시케의 여정을 닮은 구조다.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신화의 무게를 드러내는 작품은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이다. 이 소설은 여성의 내면을 질식시키는 사회적 기대와 감정의 억압을 묘사한다. 에스더는 마치 프시케처럼 외부에서 주어진 틀 속에서 살아가려 애쓰지만 결국 자신을 잃고 무너진다. 그녀가 잠드는 과정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의 침묵이며, 거기서 깨어나는 여정은 사랑이 아니라 자아를 회복하는 싸움이다. 이 작품은 프시케 이후의 서사를 여성 스스로 다시 써 내려간 대표적인 예시다.
백설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잠에 빠지고, 남성(왕자)의 키스를 통해서야 깨어난다. 왜 여자는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왜 남성의 개입 없이는 사랑도, 삶도, 자기 자신도 회복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 구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라왔고 심지어 낭만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성의 존재를 무력화하고 사랑을 남성의 구원 행위로 고정하는 오래된 신화적 코드가 숨어 있다.
이 반복되는 구조는 단지 동화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다. 그 기원은 훨씬 오래전 고대의 신화 속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와 프시케는 사랑의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백설공주보다도 더 전형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사랑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야 완성되며 여자는 항상 그 죽음을 대표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여자의 침묵과 무능을 전제로 한 남성의 행동으로 해결된다. 그것이 이야기의 완성과 사랑의 조건이 된다.
여기서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다. 판단을 멈추고, 자기감정을 억제하며, 자아의 기능을 잠시 포기하는 상태, 다시 말해 자신이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잠든 공주는 죽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완전히 수동적인 객체로 머무른다. 이때 사랑은 비로소 그녀를 덮친다. 이 구조는 매우 상징적이다. 깨어 있는 여자는 사랑을 허용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녀는 잠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사랑은 항상 여자의 부재와 무력함 위에서만 가능해진다.
프시케는 에로스를 의심한 대가로 이별을 맞는다. 이후 데메테르의 신전에 숨어들어 일하고, 온갖 불가능한 과제를 통과한 끝에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거기서 절대 열어선 안 되는 상자를 열고 죽음 같은 잠에 빠지는데 바로 이때 에로스가 그녀를 찾아와 입맞춤으로 깨운다. 신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이들은 딸 헤도네를 낳으며 행복한 결말에 도달한다. 프시케의 이 구조는 죽음-구원-완성이라는 서사 축을 통해 이후 수많은 동화의 원형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구조를 그대로 놓고 보면 사랑은 여자의 능동성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깨어 있는 프시케는 항상 시험에 들고 실패하거나 고통받는다. 진정한 완성은 그녀가 잠들었을 때, 즉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반대로 에로스는 나타나 사랑을 주고 떠났다가 다시 나타나 사랑을 완성시키는 존재다. 이 구조는 사랑을 남성의 권력 아래에 놓고 여성을 감정의 수동적 수용자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사랑의 정의가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가 단순한 신화나 동화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랑을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감정으로 교육받는다. 특히 여성은 사랑받기 위해 자기를 죽이거나 참거나 기다리는 역할로 규정된다. 깨어 있는 동안은 혼란과 분열만 있고 잠든 이후에야 비로소 사랑과 구원이 찾아온다. 결국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침묵을 전제로 한 통제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낭만이 아닌 반복 학습된 복종의 상징이 된다.
더욱 심각한 건 이 서사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우연히 만난 상대, 설명할 수 없는 끌림,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관계가 진전되는 서사는 여전히 로맨스 장르의 핵심 공식이다. 감정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감정에 반응하는 객체로 존재한다. 사랑은 마치 외부에서 내려오는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여자는 그것을 피하거나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서사의 진짜 시작은 남성의 등장이고 여성은 그 서사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또한 이 구조는 여성의 믿음을 시험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이성적 판단을 금기시한다. 프시케는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이것은 단순한 의심의 대가가 아니다. 여성의 알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다뤄지는지 보여준다. 보고자 했고, 판단하려 했고, 선택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벌을 받는다. 결국 그녀가 다시 사랑을 얻기 위해 해야 했던 것은 모든 주체성을 내려놓고, 과제를 수행하고, 기다리고, 침묵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구조는 감정의 깊이를 고통의 대가로 전환시킨다. 사랑을 진짜로 얻기 위해서는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는 믿음, 그 믿음 속에는 여자가 감정을 증명하기 위해 겪어야 할 일정량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무의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신화적 위엄이나 자기실현으로 정당화되기보다는, 사랑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구조로 대체된다. 이로써 여성은 감정의 윤리적 주체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로 굳어지고 만다.
이 신화 구조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랑의 이상형처럼 포장된다는 데 있다. 프시케가 잠들었을 때 사랑은 아름답게 완성되지만 그녀가 깨어 있는 순간 사랑은 언제나 흔들리고 위태롭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너무 오랫동안 받아들여왔다. 감정이 깊을수록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억제해야 하고 관계를 지키려면 의심이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이 신화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빌미로 한 자아의 해체를 반복시키는 무의식적 기제다.
그리고 신화는 마지막 순간조차 그녀의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프시케는 결국 깨어났고 사랑도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화는 그 이후 그녀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사랑은 구원으로 끝났고 그녀는 더 이상 서사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 이 침묵은 의미심장하다. 이야기들은 종종 여성을 사랑받기 전까지의 존재로만 묘사하고 사랑 이후의 자율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깨어난 그녀는 누구였을까? 신화는 거기서 멈추지만 우리 질문은 거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는 잠든 공주 서사의 원형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을 누군가가 희생하고 침묵해야 완성되는 이야기로 받아들여 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묻는다. 왜 사랑은 항상 여자의 부재와 잠을 조건으로 삼는가? 왜 그녀는 깨어 있는 동안 고통받고, 판단하며 실패해야만 했는가?
진짜 사랑은 그런 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깨어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끝없이 협상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다. 프시케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야 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써야 한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키스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깨어난 뒤의 사랑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서사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