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가 여자가 되던 날, 신은 그를 선택했다

by 야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뜻밖에도 여장을 하거나 성 전환을 겪는 영웅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왜 그런 변화를 경험했을까? 이 글에서는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들의 여장 이야기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이피스 같은 성 전환자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나아가 이 신화들이 현대 문학과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함께 살펴본다.




신화 이야기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들 가운데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아킬레우스는 모두 여장을 한 경험이 있다. 헤라클레스는 친구 이피토스를 술자리에서 실수로 죽인 후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델포이 신전에 찾아가 신탁을 받았다. 그 신탁은 그가 옴팔로스 왕국의 여왕 옴팔레 밑에서 1년간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옴팔레 여왕은 남편을 잃은 뒤 음란하고 문란한 성 풍습이 만연한 인물이었으며 헤라클레스는 신탁에 따라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지내며 여왕의 명령에 따라 등을 태우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를 찾아 아테네로 가는 길에 수많은 도둑과 악당을 처단했다. 그런데 케피소스 강가에 이르렀을 때 피탈로스 집안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테세우스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 죄를 씻기 위해 그 부인복인 이오니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풀라는 요구를 했다. 테세우스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뜻에 따라 여장을 하고 거룩한 궁전으로 들어갔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지 않으려 어머니 테티스의 명령으로 리코메데스 왕궁에서 여장하고 지냈다. 전쟁에 군사를 모으던 아가멤논이 오디세우스를 장물꾼으로 변장시켜 무기와 장신구를 팔러 보내자 모두가 장신구를 만진 데 비해 아킬레우스만 무기를 만지는 바람에 쉽게 그의 정체가 드러나고 전쟁에 나서게 된다.



한편, 신화 속 성 전환자도 존재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어느 날 사랑하는 뱀 두 마리를 지팡이로 때린 후 7년간 여성으로 살았다가 다시 뱀을 때려 남성으로 돌아왔다. 두 성별을 경험한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성관계 시 쾌감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여성이 더 큰 쾌감을 느낀다”는 답을 해 헤라의 저주로 장님이 되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그에게 예지력을 주었다.



또 이피스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어머니가 딸임을 숨기고 아들로 키웠다. 사랑하는 이안테와 결혼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이피스는 어머니와 함께 신전에 기도했고 신전이 흔들리는 등 징조가 나타난 뒤 남자로 변해 이안테와 결혼하였다.




신화와 문학




헤라클레스는 여장 이후 트로이아 원정, 기간토마키아 전쟁 등을 거쳐 신으로 격상된다. 테세우스는 여장과 정화 과정을 통해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아킬레우스는 비전사에서 영웅 전사로 거듭난다. 이들의 여장 경험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일종의 속죄와 재탄생, 신격화 과정이자 사회 질서 내 경계를 넘는 의례적 통과의례였다.



현대 문학에서도 이런 모티브는 자주 발견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극단적 정신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 이야기를 그렸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검은 튤립은 고난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는 주인공을 다룬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 발레를 선택해 새로운 자신을 찾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여장과 변신을 통한 정체성 확립의 현대적 변주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카하시 루미코의 애니메이션 란마 1/2은 주인공이 차가운 물에 닿으면 여성으로, 뜨거운 물에 닿으면 남성으로 변하는 설정으로 테이레시아스 신화를 참조했다.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미들섹스 역시 양성구유 주인공이 성장과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고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여장은 단순한 변장이 아닌 복잡한 상징과 의례적 의미를 내포한 행위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아킬레우스가 각각 겪은 여장 경험은 그들이 저지른 죄와 한계를 씻고 극복하는 속죄의 과정이었으며 기존 사회와 신화 질서를 넘어선 변신이기도 했다. 특히 헤라클레스는 친구 이피토스를 죽인 뒤 신탁에 따라 옴팔레 여왕 밑에서 1년간 노예처럼 살며 여성의 옷을 입었다. 이 기간은 단순한 노역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 권위와 영웅적 위상을 내려놓고 본능과 사회적 역할을 재정립하는 시기를 통과했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한계, 저주와 고통을 온전히 체험하는 동시에 내면적 성장을 이룬 시간이었다. 이후 헤라클레스는 트로이아 전쟁과 기간토마키아 전쟁에 참여하며 신으로 올라서는 여정을 완성한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의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악당들과 도둑을 처단하는 길을 지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피탈로스 집안 사람들의 요구로 부인복을 입고 머리를 푸는 여장을 하게 된다. 이 여장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이전 자신의 폭력적 행위를 정화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통과의례였다. 권력자가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회적 재생산 과정인 셈이다. 아킬레우스 또한 전쟁 참여를 거부하고 리코메데스 왕궁에서 여장하며 숨었지만 오디세우스의 교묘한 계획으로 정체가 발각되어 결국 영웅 전사로 거듭난다.



고대 사회에서 속죄와 정화 의례는 인간이 신성한 질서에 다시 편입되는 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여장이라는 성별 경계 넘기는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위상을 전복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특히 남성 영웅들이 여성적 옷을 입는 행위는 경계와 이분법을 넘는 지점에 위치한 리미널리티(liminality) 상태로 빅터 터너가 말한 한계적 경계 상태에 해당한다. 이 상태에서 영웅은 기존 질서로부터 잠시 분리되어 탈피와 재탄생을 준비한다. 이는 단순한 성별 전환이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재생산 과정이자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의례다.



역사적 사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죽음을 앞두고 여장하며 자신을 신격화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을 제우스-아문의 아들로 칭하며 기존 인간을 넘어 신적 존재가 되려 했다. 헤라클레스와 같이 여장은 그에게 신화적 신격화로 나아가는 과정 즉 인간에서 신으로의 전환을 위한 의식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장은 고대 신화와 역사 속에서 모두 권력과 신성의 변화를 촉진하는 의례적 도구로 기능했다.



성전환자들은 고대 신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젠더에 대한 복합적 사유를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뱀 두 마리를 때린 사건으로 7년간 여성으로 살았다가 다시 남성으로 돌아왔다. 두 성별을 모두 경험한 그는 제우스와 헤라에게 “여성이 남성보다 더 큰 쾌감을 느낀다”고 답함으로써, 성별 경험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권위를 획득한다. 그의 장님 상태와 예지력은 경계를 넘은 자가 가진 신성한 지혜를 상징한다.



이피스 이야기도 중요한 성전환 신화다. 그는 원래 딸이었으나 어머니가 신탁에 따라 남자로 키웠고 결국 남성으로 변해 사랑하는 이안테와 결혼한다. 이는 신체적 성별과 사회적 역할 간의 불일치 그리고 젠더 정체성의 유동성을 드러낸다. 고대 사회에서도 성별은 고정 불변이 아닌 때로는 유연하고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신화적 성전환은 단순한 성별 변화가 아니라 종종 신성함과 연결된다. 성별 경계를 넘나드는 자들이 특별한 능력과 신비로운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고대 사회가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만 바라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젠더 유동성, 성별 사회 구성주의 같은 현대 학문과도 공명한다.



성전환 신화는 개인 정체성 탐색과 사회적 역할 수행, 운명과 사랑 문제와도 깊게 연결된다. 특히 테이레시아스와 이피스는 신체와 정체성 간 불일치를 경험하며 가족과 사회 내 갈등을 극복하거나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을 그려 신화가 젠더 문제에 대해 복잡하고 다층적인 시선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 내 성전환 혹은 젠더 유동성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배척이나 금기가 아니라 신성한 의례와 예언자적 지위 부여라는 긍정적 측면도 포함한다. 이는 당시 사회가 젠더 문제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포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신화 속 성전환 이야기는 고대 사회가 젠더 고정관념을 넘어서 다양한 정체성과 역할을 인정했음을 시사하며 현대 젠더 이론과 정체성 논의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처럼 오래된 신화는 오늘날 젠더 다양성과 포용성 담론의 역사적 뿌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결론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역사 속 여장과 성 전환의 이야기는 단순한 변장이 아니다. 그것은 영웅이 기존 질서를 넘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통과의례이며 신격화와 정당성 확립의 과정이다. 이 모티브는 현대 문학과 예술에서도 여전히 강렬하게 살아 숨 쉬며 정체성과 변신, 경계 넘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에 깊은 영감을 준다.

keyword
이전 22화나르키소스와 포모나, 자기애의 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