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어왔다. 사랑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감정이지만 그 시작점에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도 자기 자신을 사랑한 이들이 등장한다. 나르키소스와 포모나. 겉으로 보기엔 같은 자기애로 시작했지만 이들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하나는 죽음으로, 하나는 결실로. 나는 이 글에서 자기애의 두 갈래 길, 즉 나르키소스와 포모나를 중심으로 파괴와 성장의 구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강의 신 케피소스와 요정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의 미래를 점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그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오래 살 것"이라고 말한다. 나르키소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누가 다가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짝사랑한 요정 에코의 말 없는 사랑을 무시한 후 신들의 벌로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물 위의 형상에 매혹되어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스스로를 사랑하다 죽고 그 자리에는 수선화가 피어난다. 나르키소스는 결국 자기애에 갇혀 스스로를 파괴한 인물이다.
반면 포모나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과일과 과수원의 여신이다. 그녀는 자연을 가꾸고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며 세상의 모든 사랑을 거절한다. 그런 그녀를 사랑한 남신 베르툼누스는 여러 모습으로 변신해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마지막에는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죽은 이피스의 비극을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 감화된 포모나는 마음을 연다. 이들은 결혼에 이르고 계절과 열매처럼 어울리는 관계를 맺는다. 포모나는 자기애를 지키되 타인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변화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이 두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 작품에도 반복되어왔다. 나르키소스를 모티브로 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다. 도리언은 자신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착은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개츠비는 연인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외부와의 접촉을 거부한 채 고립될 때 그것은 결국 현실과의 단절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반면 포모나와 유사한 자기애는 문학 속에서도 성장과 회복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이다. 제인은 자신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또 다른 예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빨간 머리 앤이 있다. 앤 셜리는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점차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한다. 이들은 모두 포모나처럼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거부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르키소스와 포모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방향을 향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할까.
나르키소스와 포모나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애의 구조에 있다. 나르키소스의 자기애는 폐쇄적이다. 그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하고 자신에게로만 향한 시선을 끝내 끊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환영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반영되지도, 공유되지도 않는다. 물 위에 비친 형상은 실체가 아닌 환상이며 그것에 빠진 나르키소스는 실제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이는 자기애가 고립으로 이어질 때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포모나의 자기애는 경계가 있는 자기 보존에 가깝다. 그녀는 처음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거부하지만 타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결국 마음을 연다. 그녀가 자기 자신만을 고수했더라면 결과는 나르키소스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변화하는 계절처럼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타인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이는 자기애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타인을 수용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존재로 나아간다.
이 두 인물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상징이다. SNS와 자기 브랜딩의 시대,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 얼굴을 통해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얼굴이 진짜 나인지 누군가의 시선을 위해 만들어낸 허상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나르키소스처럼 자기를 소진하게 될 위험에 처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결국 반영된 자아와의 무한 루프를 만들 뿐이다.
포모나가 보여주는 자기애는 다르다. 자신을 우선하지만 타인의 존재를 통해 세계를 열어간다. 경계 안에 타인을 들이는 일, 변화 앞에서 자기 기준을 조정하는 일, 사랑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성숙한 자기애의 조건이다. 자기애가 독립성으로 이어질지 고립으로 향할지는 바로 이러한 태도에 달려 있다. 자기애는 나 자신을 아끼는 일인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타자와 맺는 관계의 형식을 규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애는 결코 파괴되어야 할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구조가 자폐적이라면 그 끝에는 반드시 무너짐이 따라온다. 포모나는 말한다. 나 자신을 돌보되 타인의 존재를 외면하지 말라고. 나르키소스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물 위에 사라진 얼굴이, 남겨진 침묵으로 말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애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보호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을 알아가고 변화에 맞서 조율하는 과정인가? 포모나의 변화는 내면에서 이뤄진 사유의 전환이며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조정한 결단이었다. 반면 나르키소스는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고정된 형상 속에 자신을 가두고 그 안에서만 만족을 찾았다. 변화 없는 자기애는 결국 정체이고, 정체는 곧 파괴를 부른다.
자기애는 관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관계란 타인의 시선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서부터 자기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인을 향하지만 진정한 자기애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토대를 세우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나를 사랑하려 하는지 묻는 그 사유가 없다면 자기애는 결국 자기 연민이나 자기 방어로 퇴행할 뿐이다. 포모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응답했다. 나르키소스는 질문을 피해갔다. 그 차이가 생사를 가른다.
결국,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나를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에 놓여 있다. 자기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취향이나 심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철학적 실천이 되었다. 자기애의 구조는 곧 삶의 태도를 결정짓고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르키소스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기애는 눈이 아니라 시선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시선을 다시 배워야 할 때에 와 있다.
이러한 고찰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 구조로도 확장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정체성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그 정체성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 과잉노출의 사회, 비교의 사회, 자기 브랜딩의 사회는 모두 표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되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경쟁력 있는 얼굴, 매끈한 정체성, 쉽게 소비되는 나를 요구한다. 자기애는 그렇게 조작되고 기획된다. 그 과정에서 진짜 나는 사라진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존재처럼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가공하는 데 익숙해진다.
이처럼 나르키소스와 포모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신화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우리 사이, 진짜 자아와 보여지는 자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축소판이다. 나르키소스적 자기애는 외부를 차단하고 자신의 환상에 몰입하게 만들며 결국 실체 없는 이미지에 목숨을 건다. 반면 포모나적 자기애는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문을 연다. 자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이야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기애는 후자일 것이다. 타인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자신만을 고집하는 양극단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지하면서도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기애. 그것이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성숙한 자기애의 윤리일지 모른다.
이제 질문은 독자의 몫이다. 나는 나르키소스처럼 닫힌 시선 속에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포모나처럼 나 자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존재에 응답할 수 있는가. 자기애는 방향의 문제다. 안으로 침잠할 것인가, 바깥을 향해 열릴 것인가. 그리고 그 방향은 곧, 우리 다음 세대가 무엇을 자기애라 부르게 될지를 결정짓는다. 우리 안의 나르키소스와 포모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균형을 저울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