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모스와 티스베 : 로미오와 줄리엣 원형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본 적이 있을까. 만질 수도 없고, 마주할 수도 없고, 오직 틈 사이로 속삭이는 사랑.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그런 사랑을 했다. 바빌론의 젊은 남녀였던 이들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서로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벽에 난 작은 틈을 통해 하루하루 마음을 나누었다. 틈 사이로 전해진 말은 늘 짧았고, 입맞춤은 벽 너머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니노스 왕의 무덤, 그리고 그 곁의 하얀 뽕나무.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샘터에서 피 묻은 사자를 마주친다. 놀라 도망치다 너울을 떨어뜨린 그녀는 숨고, 곧이어 도착한 피라모스는 찢어진 너울과 피의 흔적만을 보게 된다. 그녀가 죽은 줄 안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티스베가 돌아왔을 때 피라모스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연인을 품고 눈물을 흘리다가 그가 사용한 칼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두 사람의 피는 뽕나무 열매를 붉게 물들였다. 하얗던 열매는 붉고 검게 변했고, 사람들은 그 열매를 보고 오래도록 두 사람을 기억했다. 신들은 그들에게 영원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두 사람의 감정을 하나로 만들었다.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죽음으로 완결되었다. 그리고 그 완결은 수천 년을 건너 지금까지 전해졌다.
피라모스와 티스베의 이야기는 고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여운은 훨씬 먼 시대까지 이어졌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구조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부모의 반대, 도망을 약속한 연인, 오해로 인한 자살, 그리고 죽음 이후에야 이루어진 화해. 사랑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이 신화적 구조는 이후에도 다양한 문화권과 시대를 가로질러 반복되었다.
중국 고전소설 축영대와 양산백에서도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축영대는 부모의 뜻에 따라 다른 이와 결혼해야 했고, 절망 속에서 죽은 그녀의 무덤은 장례 중 열려 두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살아서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죽은 뒤에야 함께할 수 있었던 사랑. 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자연은 그 감정을 기억하고 상징으로 남긴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런 구조는 여전히 반복된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며칠간의 강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가족을 선택하며 그와 함께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죽은 후 그의 곁에 묻히기를 원한다. 짧은 만남은 인생 전체를 덮고, 완성되지 않은 사랑은 삶의 마지막 선택을 지배한다. 감정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남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사랑과 죽음의 경계에 선 감정을 그린다. 나오코가 사랑했던 사람은 기즈키였다. 하지만 기즈키는 열일곱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순간 나오코의 시간도 멈춰버린다. 이후 그녀는 와타나베와의 관계 속에서도 끝내 그 죽음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남겨진 건 부재와 기억, 그리고 닿을 수 없었던 감정의 잔상이다. 죽음은 관계를 끊어놓지만, 동시에 감정을 봉인한다. 나오코는 영원히 과거에 머물렀고 와타나베는 그 봉인된 감정과 끝까지 함께 걸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라 멈춰버린 사랑이 얼마나 강하게 남는지를 보여준다.
신화에서 문학으로, 시대는 바뀌었지만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랑이 죽음과 맞닿았을 때,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이루어진 사랑은 완결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살아남는다. 사랑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어떤 연인은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어떤 연인은 스쳐 지나간다. 어떤 사랑은 마침내 이뤄지고, 어떤 사랑은 엇갈린 채로 끝난다. 수많은 사랑이 있고 수많은 결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는 사랑은 언제나 그 하나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죽음 앞에서 멈춰 선 사랑. 결국 서로를 끌어안지도 못한 채 상대의 죽음을 오해했고, 그 오해 위에 목숨을 걸었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진심을 말하게 된 사랑.
피라모스와 티스베. 로미오와 줄리엣. 축영대와 양산백. 그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왜 사랑이 완성되지 못했을 때, 오히려 이야기는 더 오래 살아남았을까?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서로를 만나고, 장벽을 넘고, 함께 늙어가는 이야기. 현실의 노력과 인내,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결말이다. 반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인간이 어떻게도 다룰 수 없는 운명과 불가항력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해피엔딩을 목표로 여기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로망이 된다. 해피엔딩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지만, 로망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것을 더 오래 기억한다.
그 로망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음은 감정을 고정시킨다. 살아 있는 사랑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감정은 흐르고, 관계는 바뀌며, 상처는 생긴다. 하지만 죽은 감정은 바뀌지 않는다. 더는 흔들리지 않고, 더는 의심받지 않으며, 더는 상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사랑은 살아 있는 사랑보다 더 완전하게 느껴진다. 피라모스와 티스베의 피는 뽕나무 열매를 붉게 물들이며 영원한 상징이 되었고, 줄리엣의 독약과 로미오의 칼은 두 가문을 침묵시키는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죽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사랑의 진심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우리는 그래서 감정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그 감정이 죽음으로 봉인되었을 때에만 진짜라고 느낀다.
이 죽음을 통한 감정의 봉인,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사회와 질서, 전통과 규범을 넘어서고자 했던 갈망이 있다. 사랑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금지되고, 어떤 관계는 시대가 용납하지 않으며, 어떤 감정은 제도에 의해 경멸당한다. 사랑이 개인의 감정인 동시에 사회적 행위인 이유다.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부모의 반대 앞에서 죽었고, 레안드로스는 종교의 경계선을 넘다 죽었으며, 축영대는 신분의 틀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사회의 기준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지만 단 하나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죽음. 사랑을 완성할 수 없을 때 그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마지막 수단.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선언을 로망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감정의 흔들림에 익숙하면서도 그것을 증명할 수단을 찾지 못한다. 영원을 바라고, 절대성을 원하지만, 그에 도달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감정이라는 판타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 판타지를 보증하는 유일한 장치가 바로 죽음이다. 셰익스피어가 훔쳐간 건 단순한 바빌론 신화의 줄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감정을 끝까지 믿고 싶어 했던 그 간절함을 훔쳤다. 믿고 싶지만 끝까지 가질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을 완성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로서 죽음을 가져왔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로망으로 남아 있다.
지금 시대는 더 이상 사랑을 죽음으로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야기 속 사랑은 살아남고, 함께 살고, 결혼하거나 다시 만난다. 우리는 가능한 사랑의 모습을 더 많이 상상하게 되었고 더 다양한 해피엔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하나의 구조가 살아 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단 하나의 감정을 위해 죽음까지 선택했던 이야기. 우리는 여전히 그런 사랑을 꿈꾼다. 잊히지 않는 사랑을 원하고, 실패하지 않는 감정을 원하며, 변하지 않는 마음을 바란다.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만 보증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은 살아서 완성되기를 바라는 감정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감정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완성하는 대신 그것을 봉인하려 한다. 그리고 그 봉인은 언제나 죽음의 형태를 띤다. 피라모스와 티스베, 줄리엣과 로미오, 무덤과 피, 칼과 나비.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 사랑을 상상하고, 감정을 복제하고, 로망을 생산한다. 이루어진 사랑은 현실이 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기억이 된다. 결국 인간은 선택한다. 하나의 완전한 실패를 하나의 완전한 감정으로.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도 가장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의 패턴으로 돌아간다. 만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죽음으로 끝난 사랑. 그 이야기는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에서 완성된다. 피라모스와 티스베가 뽕나무 아래 남긴 피의 흔적, 줄리엣의 독약과 로미오의 칼, 축영대 무덤에서 날아간 나비 한 쌍.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감정을 봉인하기 위해 만든 문장이고, 상징이며, 의식이다.
문학은 그것을 반복했고, 신화는 그것을 시작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감정을 의심할수록 감정을 고정하려는 욕망은 더 강해지고, 죽음은 그 욕망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실현해 준다. 그러므로 이 오래된 구조는 낡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끝내 이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왜 완성된 사랑보다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더 깊이 믿게 되는 걸까. 그 답을 알기 전까지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영원히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