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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자랑 좀 할 수도 있지! 이건 너무하잖아!!

신에게 대항한 어머니들 – 니오베와 데메테르

by 야담


신화 이야기




오만으로 돌이 된 니오베


니오베는 테바이의 왕비였다. 그녀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재능을 부여받은 암피온과 결혼하여 아들 일곱, 딸 일곱을 낳았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자식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는 곧 그녀의 존재 이유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딸 만토가 “레토 여신께 제를 올리라”는 신탁을 받고 테바이의 여자들을 모아 여신을 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니오베는 그 광경을 비웃는다.

니오베는 말했다. “레토는 자식이 둘 뿐이지만, 나는 열네 명이다. 왜 나를 두고 그녀에게 예배를 드리는가?”



그녀는 직접 여인들의 제사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더 경배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레토의 귀에 들어가고 분노한 여신은 자식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불러 복수를 명한다. 아폴론은 니오베의 아들들을, 아르테미스는 딸들을 차례로 쏘아 죽인다. 하루아침에 모든 자식이 쓰러진다.



자식의 몰살을 눈앞에서 지켜본 암피온은 절망 끝에 자결하고, 니오베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인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그 자리에서 몸이 돌로 변해버린다. 돌이 된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신들은 그녀를 고향 땅의 산꼭대기로 옮긴다. 오늘날까지도 그녀는 그곳에서 울고 있다고 한다. 니오베의 이야기는 자식의 과도한 자랑이 어떻게 신의 분노를 부르고, 한 가문 전체가 몰락하는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신화다.



질서의 창조자가 된 데메테르


데메테르의 신화는 정반대의 구조를 지닌다. 그녀는 대지와 곡물의 여신이며 딸 페르세포네와 깊은 유대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저승의 왕비로 삼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데메테르는 딸을 찾기 위해 땅 위를 떠돌며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을 헤맨다. 그 여정에서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 가문의 집에 들르게 되고 그곳에서 소년 데모폰을 불 속에 넣어 불사의 존재로 만들려다 중단된다. 이 사건은 인간과 신의 경계를 확인시키는 동시에 그녀의 슬픔과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된다.



데메테르는 딸을 되찾기 전까지 절대 곡식을 자라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모든 작물의 성장을 멈춘다. 이로 인해 세상은 기근에 빠지고 인간들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제우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도록 명령하지만, 하데스는 몰래 석류를 그녀에게 먹인다. 저승에서 음식을 먹은 자는 그곳에 귀속된다는 법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페르세포네는 완전히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년 중 절반은 저승에서,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서 보내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 결정으로 데메테르는 딸이 돌아오는 시기엔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딸이 떠나는 시기엔 대지를 말리게 된다. 이렇게 계절의 순환이 탄생한다. 데메테르의 저항은 세계의 파괴가 아닌 새 질서의 창조로 귀결된다. 그녀는 상실과 고통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운행 구조를 바꾼 창조적 어머니가 된다.




신화와 예술




니오베의 서사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오만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 니오베의 딸을 지키려는 니오베가 있다. 이 그림은 단순한 모성애 이상의 공포와 절망을 그려낸다.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작품들이 오만의 파멸이라는 공통 구조를 공유한다. 특히 맥베스는 신탁을 믿고 지나친 권력욕으로 몰락하는데 이는 니오베가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가 대가를 치르는 구조와 겹친다.



데메테르의 신화는 오히려 창조적 파괴, 즉 상실을 통한 질서의 재편이라는 모티브로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오만한 창조가 파멸로 이어지는 반면, 데메테르는 신과의 협상을 통해 세계의 구조를 다시 짠다. 이 차이는 현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여성 서사의 맥락에서 모성은 종종 파괴적이거나 희생적이며 동시에 창조적이다. 데메테르는 감정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자연의 리듬으로 확장시킨 존재다.




고찰




니오베의 이야기는 단순한 오만의 경고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많은 자식을 두었다는 이유로 레토 여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신의 제례를 멈추게 하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단순한 자랑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위는 인간이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식이다. 니오베는 그 의식을 무시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신보다 위에 놓았다. 이는 고대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위계 전복의 시도였다.



이러한 오만은 니오베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속한 가문 전체의 흐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니오베는 탄탈로스의 딸이다. 탄탈로스는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요리해 바치고, 그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이 계보는 펠롭스, 아트레우스, 아가멤논,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며 연쇄적인 저주와 몰락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즉, 니오베의 오만은 고립된 행동이 아니라, 이미 신의 권위에 도전한 혈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녀의 자식 자랑은 단순히 많은 자녀를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녀 수를 통해 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겼고 그것을 공공연히 발설했다. 이는 신성모독이다. 니오베가 돌로 변한 것도 단순한 벌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감정을 발화할 수 없는 상태, 감정이 고여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녀는 울 수는 있지만 말할 수 없다. 그 돌덩이 안에는 인간의 감정도, 오만도, 슬픔도, 후회도 고정되어 있다.



데메테르는 자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의 시작은 상실이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으로 납치된 순간부터 그녀는 신들과의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데메테르의 저항은 물리적 힘으로 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을 자라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정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감정의 외침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구조 자체를 흔드는 방식이다.



그녀는 직접적인 복수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연의 작동을 중지시켜 신들이 먼저 다가오도록 만든다. 이때 그녀는 이미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신들이 협상을 제안하는 위치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결국 페르세포네는 완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1년 중 일부만 지상에 머무르게 되지만 데메테르는 이 조건에 동의한다. 이는 타협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우주의 창출이다. 계절이라는 질서는 데메테르의 감정에서 비롯된 상실의 질서이며 인간 세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데메테르의 감정은 그녀 개인의 고통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고통을 세계 전체가 감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감정을 계절이라는 보편적 질서로 번역해 낸다. 이 지점에서 데메테르는 단순한 모성이 아니라 감정의 절제와 확장을 통해 신과 대등한 창조의 위치에 이른다. 이는 페르세포네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순환 속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슬픔을 통제함으로써 세계를 조율한다.



니오베와 데메테르는 모두 자식을 중심으로 감정이 폭발한 어머니들이다. 하지만 니오베는 자식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데메테르는 자식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들의 차이는 곧 신화 구조의 차이로 이어진다. 니오베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그 감정은 세계와 단절되었다. 반면 데메테르는 감정을 확장시켜 타인을 움직이는 힘으로 삼았고 세계와 연결되었다.



니오베는 '자식 = 나의 확장'으로 여긴다. 자식이 많을수록 자신이 더 위대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데메테르는 '자식 = 우주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페르세포네를 저승과 지상을 오가는 존재로 두는 데에 동의함으로써 모성의 소유욕을 절제하고 세계의 순환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파괴와 창조의 갈림길이다.



결국 두 어머니는 같은 출발선인 자식을 향한 깊은 감정에서 시작했지만,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그 서사의 끝은 극적으로 갈린다. 신은 감정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감정이 질서를 무너뜨릴 때 벌을 내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때는 수용한다. 니오베는 신적 위계를 허물려다 처벌받았고 데메테르는 신과 협상하며 세계를 재구성했다. 이 차이가 곧 어머니라는 정체성이 파괴자인가 창조자인가를 가르는 핵심이 된다.




결론




니오베와 데메테르는 모두 신에 맞서 싸운 어머니들이지만 각각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니오베는 자식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신의 권위를 도전하고 그 결과 돌이 되어 끝없는 울음을 반복한다. 그녀의 감정은 자기 과시와 위계에 대한 오만으로 이어졌고 파괴를 낳았다. 데메테르는 자식을 빼앗긴 절망을 세계의 균형을 재편하는 힘으로 바꾸며 창조자가 되었다. 이 두 인물은 모성이라는 동일한 감정의 근원에서 출발했지만 그 방향과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기에 결과 또한 정반대였다. 신화는 언제나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과 선택을 상징화한다. 니오베는 욕망의 파괴성을, 데메테르는 애도의 창조성을 상징한다.



결국, 어머니라는 존재는 파괴자일 수도 창조자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녀가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어디로 향하는가에 달려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녀를 향한 사랑이 때로는 통제와 투사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연대와 회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것은 이 신화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우리가 어떤 어머니를 선택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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