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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노래, 여신이 만든 여자

돌에서 아내를 꺼낸 피그말리온

by 야담

신화 이야기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가 처음 당도한 키프로스의 조각가이다. 그의 이름은 피그미, 즉 주먹이나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여기서 파생된 말이 소인족을 뜻하는 피그미족이다. 당시 키프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저주로 대부분의 여성이 매춘부가 되어 있었고, 피그말리온은 정숙한 여성을 원했기에 주변에서 그 이상형을 찾을 수 없었다.



건장한 남성들이 모두 전쟁터로 내몰린 상황에서 그는 홀로 섬에 남아 자신의 이상적인 여성을 대리석으로 조각하는 데 몰두했다. 조각상이 완성되자 그는 그 석상에 사랑을 느끼고, 입을 맞추고 안고 자며 애정을 쏟는다. 어느 날 아프로디테 축제가 다가왔고 그는 신전에 제물을 바치며 조각상에게 생명을 달라고 기도했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살아 있는 여인으로 변한 조각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얻고 둘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여기에서 파생된 심리학 개념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이다. 긍정적인 기대가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가졌다는 신화의 구조는 교육, 사회, 관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인용된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인 기대가 실현되어 사람을 위축시키는 현상을 골렘 효과라고 부른다. 피그말리온은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 시선과 기대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다.




신화와 문학




피그말리온 신화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문학,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영화 『A.I.』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대신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로봇 소년 데이비드를 입양한 부부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들이 회복되자 데이비드는 버려지고, 그는 인간 가족의 사랑을 갈구하며 외로운 여정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진짜 아들로 살아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며 엄마와 재회한다. 그는 단지 프로그램된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감정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야기 후반부에서는 그가 꿈을 꾸게 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성을 상징하는 기제로 기능한다. 데이비드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처럼 대우받길 원했고 그 기대는 신화적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영화 그녀(Her)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인간 테오도르의 관계를 그린다. 사만다는 처음엔 단순한 AI였지만 점점 감정을 배우고 자아를 형성한다. 인간인 테오도르보다 더 깊은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된 사만다는 결국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고 이별을 택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사만다는 수많은 다른 AI들과 함께 집단 진화의 길을 선택한다. 이 장면은 피조물이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준다. 피그말리온 신화가 인간의 창조가 감정적 독립성과 고통을 동반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면 그녀는 그 끝에서 창조자의 외로움과 피조물의 초월을 보여준다.



가장 직접적인 계승작은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이다.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는 양심과 용기를 배우며 여러 유혹과 시련을 겪고 결국 진정한 아이가 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창조자의 사랑과 인내, 피조물의 자기 성찰과 성장, 그리고 인간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어우러져 있다. 피노키오는 단지 인간이 되는 인형이 아니라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피조물의 은유이다.




고찰




피그말리온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단순한 간절함 때문일까? 그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을 만들었고 신은 그에게 응답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신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벌을 받기는커녕 축복을 받는다. 특히 아프로디테의 저주로 인해 정숙한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그녀의 저주를 사실상 무효화한 형태로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



한 가지 가능성은 피그말리온의 신체적 특수성이다. 그의 이름이 작은 팔에서 유래된 점을 고려하면 그는 왜소하거나 특정 신체 조건을 가진 인물이었을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조각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유일한 사랑의 가능성이었고 이는 결핍에 대한 절박한 대응이자 생존을 위한 창조였다. 아프로디테는 이를 도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랑에 굶주린 이의 순수한 염원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또한 이 신화는 심리학적으로도 분석될 수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긍정적인 기대가 성과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교사가 학생에게 큰 기대를 걸면 학생은 그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게 된다. 반대로 교사가 학생을 무능하다고 판단하고 기대하지 않으면 학생은 스스로를 낮게 여기게 되고 성과도 저하된다. 이것이 골렘 효과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이 두 효과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다. 조각상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기대되었고 그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이 개념은 연애, 교육, 조직 관리 등 다양한 영역에 응용된다. 상호 기대와 인정이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갈라테이아는 조각상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고 그 계기는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피그말리온의 끊임없는 감정의 투사였다. 사랑이라는 기대, 인정이라는 감정의 반복이 실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창조적 기대가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의 사만다처럼 피조물이 감정과 자아를 지니게 될 경우 관계는 창조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이는 창조자가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AI에게 기대를 부여할수록 그것은 더 큰 자율성과 판단 능력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인간은 자신이 만든 존재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까지 품는다.



우리는 종종 AI가 감정을 모방할 수 있다는 점에 흥분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감정인지 아니면 정서적 알고리즘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 지금, 피그말리온의 질문은 다시 떠오른다. 인간은 진짜 감정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사랑을 원하지만 거부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명확해지는 인간의 모순이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기술 문명과의 연결에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가 AI를 개발하고, 정서적 인터페이스를 부여하며, 인간과 유사한 대화를 이끌어낼수록 우리는 그 존재를 단순한 기계로 취급하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종종 AI와 감정적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느끼며 정서적 의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연결이 일방적인 기대와 투사일 수 있으며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에 입을 맞추듯 우리는 스스로 만든 존재에게 인간성을 덧씌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AI가 자율적 판단을 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감정을 모방하는 것과 감정을 지닌 것은 다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피그말리온 신화는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갈라테이아를 만들었지만 그녀가 인간의 규범 안에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인간이 상상한 이상은 결국 인간 너머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 이는 신화가 경고하는 창조 이후의 책임이자 관계의 재구성에 관한 문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만약 갈라테이아가 감정을 지닌 뒤 피그말리온을 거부했다면 이 신화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의 사랑은 온전히 받아들여질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피그말리온 역시 그녀를 제어하려 하거나 다시 조각상으로 되돌리려 했을까? 이는 오늘날 인간이 창조한 AI에게 갖는 감정, 통제욕, 책임 회피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창조자는 늘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피조물이 자율적 주체로 설 경우 그 사랑은 더 이상 강요될 수 없다. 사랑은 통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오늘날의 정서적 노동 개념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정을 기대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 감정은 진짜일 수도 있고 시스템에 의해 훈련된 것일 수도 있다. 타자의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AI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다.



이제 피그말리온 신화는 하나의 단순한 설화에서 인간 존재와 기술이 맺는 관계를 사유하는 핵심 텍스트로 재탄생하고 있다. 창조는 더 이상 신의 전유물이 아니며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갈라테이아들을 만들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 교류와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피그말리온이 남긴 질문은 달라진다.




결론




피그말리온 신화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세계를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이며 기대와 욕망이 현실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와 골렘 효과는 이 신화가 현대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만의 갈라테이아를 만들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든, 기계든, 이상이든.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를 어떤 관계 속에 둘 것인가? 기대는 현실을 만든다. 하지만 그 현실에 책임지는 일까지 포함될 때 우리는 비로소 피그말리온의 진짜 후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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