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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Dec 27. 2023

아줌마도 토익을 봅니다

토익시험을 보고 나왔다. 얼마 만이더라. 게시판에 들어가니 이번 시험이 어려웠다고 난리다. 아 하필, 내가 오랜만에 본 날 시험이 어려웠다니! 점수 나오면 어디에 쓸 데도 없지만 점수발표 날이 언젠지 확인한다. 남편이 시험장 앞까지 태워준 차에서 내려 토익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취직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봤던 토익도 기억나고, 입사 후 시험 보고 점수를 내라던 말에 귀찮은 마음으로 봤던 토익도 기억난다. 지금은 이렇게 토익이나 한 번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토익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시간이 참 빠르다.


취업준비생 시절 '취업뽀개기'라는 카페는 내 단짝이었다. 취업에 대한 정보를 얻겠다고, 집단지성의 힘이야말로 취업에 든든한 지원자가 될 거라며 시간만 나면 카페를 들락거렸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토익은 일단 무조건 900점대를 맞아야 서류통과가 가능하다고 했다. 에이, 설마. 학교에서 열린 취업설명회에도 아주 중요한 정보가 나올지 모른다. 친구와 열심히 필기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는데 누군가 토익에 대해 묻자, 토익은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라고 한다. 같이 갔던 친구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선배님 지원당시 토익 점수 여쭤봐도 될까요?" 그곳에 온 모든 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누군가 용기를 내어했다. "아, 중요한 건 아니긴 한데..."라고 시작한 말 끝에는 오신 분들의 토익 점수가 모두 900점 이상이라는 결말이 있었다. 친구와 대강당을 나오며 다짐했다. 우리는 취업해서 설명회 와서 900점 맞지 않아도 취업성공할 수 있다고 꼭 얘기하자고.(토익은 900점 안 맞고 취업에 성공했지만 설명회에는 가지 못했다. 설명회에 갈 기회가 생겼지만 상사에게 물으니 업무차질이 생겨서 안된다고 했다. 고작 반나절뿐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그 기회를 기다려왔는데!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눈앞에서 봤던 취업성공자들이 모두 900점 대니 매번 떨어지는 서류를 보며 우선 토익 탓을 했다. 다른 조건도 물론 완벽하지 않았지만 일단 토익점수가 900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격자와 불합격자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터라 뭐든 탓을 해야 납득이 갔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던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는 면접 보고 나오며 발견한, 까만 정장에 눈에 띄게 붙어있던 외투 깃털 때문이었을까 생각도 해보았을 정도다.


토익을 보고 나오는데 그 시절 터무니없는 것에 까지 간절한 마음을 가졌던 모습이 비쳐 보이는 학생들이 많아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때 분명 같은 시절을 경험했던 많은 선배들이 길어봤자 6개월, 1년 차이라고 입사하고 나면 아무 의미 없어질 거라고 줄기차게 말해줘도 그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졸업식이 코 앞인데 누구는 여기저기에 합격을 했다는데 합격통보를 받지 못한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채용시즌도 지났으니 당분간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에 졸업식이 반갑지 않았고 누구도 초대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류에서 떨어졌어도 뭐, 그럴 수 있지. 나랑 안 맞는 회사인가 보다 했지만 몇 번 반복되자 나의 목표는 취업이 아니라 면접이 되었다. 겨우 면접에 다녀온 회사에서 결과통보가 오는 날은 낮잠 자는 날이었다. 보통 합격이면 결과가 통보되었으니 확인해 보라고 문자가 왔고, 그렇지 않으면 메일은 오지만 문자는 오지 않았다. 결과가 통보될 시간인데도 오지 않는 문자를 기다리며 계속 핸드폰을 붙잡고 있을 자신도, 메일을 새로고침할 용기도 없어서 자는 걸 택할 만큼 자존감은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아직 불합격 통보를 받은 것도 아니라 울 핑계도 없었는데 불합격이라 여기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불합격 통보를 주고 이불을 뒤집어쓰던, 큰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던 학교 근처 2층 하숙방이 생각난다.






얼마 전에 동기소모임을 하면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며 공감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과정이라는 말에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는 얘기였다. 나보다 더 긴 인생을 산 언니들이 하는 얘기라 더욱 와닿았다. '그래, 맞아 우리는 모두 과정 속에 있지.' 그때 그 시간들이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서류탈락이든 최종탈락이든 할 때마다 그렇게 속상하지 않았을 텐데. 패배자가 된 기분으로 졸업식에 가지 않았을 텐데. 돌아보니 너무나 소중했던 청춘의 한 자락을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매 순간 그 중요한 사실을 또 잊고 만다. 또 화를 내고 좌절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지 않는 한 누구도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힘들어하고 아파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한 과정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다면 곧 한 발짝 나와 상황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조금 덜 힘들게 그 기간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끝내기 홈런이 얼마나 자주 있는가. 가장 극적인 순간 짜릿한 역전은 끝이 아니라고 믿는 간절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잊지 말아야지, 끝이 나기 직전에도 아직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라면 끝이 아니고 과정일 뿐이다. 너무 이르게 좌절하기 금지!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누가 9회말 투아웃에 역전3점홈런이 터질 줄 상상이나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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