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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Jun 06. 2024

나는 손주바보입니다

친정집은 24층 건물에 18층  오래된 아파트이다.  

낡은 엘리베이터수리를 위해 전 주민이 계단에서 체력단련 중이다. 지팡이 짚은 노인은 한 달간 강제 유배를 떠났다. 그렇게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신 지 열흘이 지났다.

다정하며 여러모로 관심이 많은 엄마는 말을 많이 하고 단순하고 뾰족한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모녀간에도 수다라는 것이 없다. 그나마 갓난 복돌이가 있어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말이 생겼다.

엄마가 "복돌이 덕분에 네 할미가 말수가 많이 늘었다"라고 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꿈에서도 까꿍 하는 지경이니 생시에 얼마나 달라졌을지 나도 깜짝 놀랄 지경이다.


바보.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건가 봐

바라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

화가 나도 바보처럼 웃게 되는 것(사랑 더하기/수호&김태우)


젊어 한때 유행하던 은어 가운데 '바보'란 것이 있었다. '바라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개성은 '개 같은 성질', 졸업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것'도 기억난다. 그 시절 은어 가운데 그래도 정감 있는 은어가 '바보'였던 것 같다. 바보라고 하면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안 좋을 텐데 '바라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린다는 것 때문에 '바보'라는 말을 듣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싫지 않았다.


최근 육아에 바보가 많이 등장한다. 딸바보 아들바보 손주바보

아이가 귀한 세대라서?

사랑을 표현하는 세대라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말로 잘 못하는 마음을 열게 하는 기적을 작은 아이가 일으켰다. 덕분에 늙은 할미, 젊은 할미 둘이서 도란도란 시간도 갖는다.  단순한 아이 표정, 울음, 미소 하나에 복잡한 어른들 생각이 녹는다.

비로소 영구, 맹구가 아닌 진짜 바보의 의미로 새로 태어난 나는 이제야 바보가 되었다.


바보 하면 생각나는 사제도 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남보다 높아지길 원하고,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에게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는 인생을 살라고 강조했던 추기경님, 남을 탓하기보다 ‘내 탓이요’를 먼저 외치게 했던 천사가 된 바보사제.

복돌이가 사제의 소명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추기경님이 강론한 바보를 바르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복돌이 스테파노가 되길 바란다.


계란이 스스로 깨어지면 병아리가 되고 남이 깨뜨리면 프라이가 된다고 했던가? 아이로 인해 이제야 바보가 되었으니 어쩌면 후라이(거짓) 바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에 밑줄 쫙 긋고 기쁨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손주바보가 되어보자.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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