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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린 Sep 23. 2024

걸음 하나, 그리움은 둘

이경준 사진전 | 원 스텝 어웨이


네가 지나갔던 자리에는 늘 어떤 자국이 남았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오랜 꿈처럼 느껴져서, 때로는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
그날은 유독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리움이 조금 더 짙어졌어. 내 안에 그렇게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마음이 있을 줄 몰랐어. 빛이 바래지도 않고 그대로 거기 있었던 거야. 현실을 살면서 그 묵은 감정들을 구석으로 미뤄두고, 나의 오늘이 쌓이고 쌓여 그 오랜 감정들을 서서히 덮어갈 동안에도.
아마도 나를 잊었겠지만, 적어도 나는 잊지 않았어.

어쩌면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거—
그런 것도 사랑이었는지 몰라.


24.02.23 습작




사진을 보고 나서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가을의 모습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어린 시절의 가을, 주황색으로 물든 나뭇잎과 건조하고 선선한 가을바람, 한산하고 널찍한 길목. 은행 열매를 밟을까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그 계절의 색깔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던 시간이 그곳에 있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운 마음들을 상상도 못 한 곳에서 맞닥뜨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계절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농구 코트를 보고 아빠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무언가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다정함은 계절을 타지 않는다.


어느 계절 즈음일까,

초여름이려나.


사진 속에 담긴 계절감이 마음에 들었다,

없던 향수도 생기게 하는 사진인 것만 같아서.



그냥 얼음과 물일 뿐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 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김영하, <작별인사>



예측 불가한 우연이었다.
|
빛을 머금어 일렁이던 것이 꼭 내 마음 같아
고작 물에 불과한 것을 눈앞에 두고 네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강물이었다면 너는 빗방울 하나였겠다,
어쩌면 쏟아지는 빗줄기였겠다.
넓고 깊고 빛나던 곳에 닿았을 그 빗방울이
빛 한 방울 되어 물속에 번졌겠다.
그 작은 파동은 강을 이루었겠다.
그렇게 빗방울은 강의 일부가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방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의 파동은 너무 작다고 하겠지만,
그 한 방울이 머금은 세상은 닿아본 존재만이 알 수 있으므로

그저 잔잔한 사랑이었겠단 말밖에는.


24.08.28 습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청혼’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농담’




어떤 겨울에는 드러누웠던 눈밭 위에 우리 흔적이 희미하게 남았지. 먼저 일어났던 네가 누웠던 자리는 꼭 천사가 지나간 것만 같았어. 나는 혼자 남아 그 자리를 오래도록 눈에 담아뒀어. 다시는 없을 순간일지 몰라서.

24.02.23 습작



Editor’s Note

|

무언가를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도 다정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어쩐지 유독 많은 것들이 미웠던 지난 겨울, 혼자 다녀온 전시에서 맞닥뜨린 그리움이 아직도 짙은 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움이란 좋았던 기억들을 땔감 삼아 원하지도 않는 서글픈 감정에 불을 지피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못난 모양이라고.


하지만 이제 와서 거꾸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리움이라는 마음 하나로 인해 스스로의 삶을 더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난 날에 분명 행복했다는 뜻일 테고, 그 시절에 대한 애정이 여전하다는 것이겠죠. 그러니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는 말은 결국 내 안에 여전히 사랑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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