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고하자마자 그는 예상대로 온갖 악담과 협박,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이미 그런 말에 익숙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 그는 메신저에 있는 모든 기록을 삭제하기 전까지 나를 보내지 않겠다며, 몸싸움 중 내가 할퀸 그의 손등을 들이밀며 미국 대사관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하루빨리 이 미친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결국 그와 나눈 대화들을 모두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더 이상 앞으로의 인생동안 엮이고 싶지 않았다. 황급히 난 다시 본래 내가 지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 평화로움을 뿌리치고 지금까지 뭘 한 거지? 한동안 그가 나를 해코지할까 두려움 속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가 떠나더라도, 내 인생에서 사라지더라도, 나는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여전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이곳의 치열한, 치열해야만 살아남는 사회에 지치고 지쳐 맥을 못 추리는 사람이었다. 일, 집, 일, 집을 반복하며 나는 이별의 슬픔과 그가 나에게 남긴 상처가 아물기를 견디는 것조차 벅찼다. Z는 늘 잘 우는 나에게 나약하다곤 했지만, 나는 선명하게 그 아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강한 것이라는 걸 안다.
조금씩 조금씩 내 감정은 추스러졌다. '넌 영원히 내가 남긴 상처를 기억하며 살아갈 거야'라며 저주를 퍼붓던 마지막 그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절대적 해답으로 걸어 나갔다. 부아가 치밀고 우울하고 창피한 감정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해프닝이라며 이렇게 글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일상은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평화로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외주를 제안했던 이전 회사 선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무렵 난, 다시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서류 준비는 막바지 단계였다. 선배는 같은 팀으로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계획대로 캐나다를 갈지,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회사 생활을 할지 선택해야 했다. 한 순간의 선택이 밑도 끝도 없는 불행으로 빠질 수 있다는 걸 근 몇 달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나는 이번만큼 선택이 이렇게 망설여지고 무섭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땅, 대한민국에서는 나의 역할이 있다. 엄마의 든든한 딸로, 선배의 똑똑한 후배로, 대학 동기들 사이의 좋은 회사 다니는 잘난 친구로, 좋은 대학 나와 서울에 취직해 좋은 배우자 만날 일만 남은 똑 부러지는 조카로. 이 모든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식당에서 일하는 건 하등 쓸모없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통화할 때마다 어떻게 살래? 물어보며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엄마와, 나조차도 떳떳하게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게 자괴감이 들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데서 알바해? 돈은 얼마나 버니? 잠깐 알바로 일하는 거지? 회사 들어가서 몸값 올려야지. 지금 사는 집 보증금이 얼만데, 더 좋고 넓은 곳 가려면 요새 고생 적당히 해서는 안돼. 더 큰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숫자로 모든 가치가 정해지고 고생을 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는단 낡은 정론은 나를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아슬아슬한 저울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러 곳을 여행하는 건 나에게 더 이상 그런 역할을 강요받지 않는 오로지 '나'에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호주에서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함에도 그 서툰 노동력의 대가는 제법 합당했다. 난 그저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작은 동양인 여자애일 뿐, 한국에서 나를 죄어오던 어떤 기대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그런 짜릿한 자유로움 덕분에 캐나다행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철없었던 거지. 하는 생각과 엄청난 파도를 맞고 나니 얼마나 높을지 모를 인생의 파도를 다시 마주하기 무서웠다. 비록 그 파도가 발등을 살짝 적시는 정도일지라도.
갑작스레 펼쳐진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회사원으로써의 일상은 기시감마저 들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너무나 불행했고, 돈이 없어 몸과 마음이 야위어 갔던 게 그저 한 순간의 악몽처럼 선명하면서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진절머리 치던 한국의 회사 생활, 지옥철 출퇴근길, 스트레스받는 업무 강도. 그것들은 내가 이 한국 사회에서 패배자가 아니라는 일종의 괴로운 우월감과 소속감을 안겨줬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잔잔하게 괴롭고 우울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회사 생활은 쏟아지는 업무에 힘들었지만 고생한 만큼 내 입지를 빠르게 다져갔다. 나는 추천해준 선배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다른 상사들에게도 노력을 인정받았고, 근심 가득하던 통화 속 엄마의 목소리는 은근히 쾌활하게 변했다. 나는 그거면 됐다며, 잠잘 시간마저 부족한 바쁜 회사 생활 눈 딱 감고 1년만 버텨보자 생각했다. 좀비처럼 일하고 지쳐 쓰러져 자는 나날이 흘렀다. 평일에는 새벽까지 야근하느라 바빴고, 주말이면 기력이 없어 죽은 듯 모자란 잠을 자느라 바빴다. 그래도 좋은 인사평가를 받았기에 몇 달만 버티면 승진할 수 있고, 안정적인 소득과 함께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 엄마가 피땀 흘려 보태준 돈으로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착실히 출퇴근하며 엄마의 계획대로 그 보금자리에서 돈을 모으고, 엄마의 계획대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 우리 엄마가 바라는 대로 당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대한민국 평균의 삶을 사는 거야.
그러나 이런 괴로우리만치 뻔한 미래가 나에게는 같은 극끼리 만나면 서로 밀어내는 자석의 척력처럼 여간 안 끌렸다. 아니, 그것은 안 끌리는 것 이상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크게 절규하고픈 마음마저 들게 했다. 평탄하고 뻔한 일상보다 내가 선택한 삶에서 괴롭고 굶고 잠 못 드는, 결핍으로 가득했던 밤들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평온함을 무덤 속으로 느끼는 것이 나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주변 친구들에게 아무리 이 마음을 토로해도 결국은 별종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나이와 커리어 생각은 안 하는 철없는 30대일 뿐.
늘 똑같은 출근길 지하철. 문득 미간을 깊게 찌푸린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 가득 묻어난 짜증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누군가 내 어깨를 스칠 때마다 인상이 구겨지고, 누군가 큰 소리로 통화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내가 싫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날카로워지는 하루가 싫었다. 회색빛으로 번져가는 일상이 두려웠다. 차창에 비친 얼굴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양귀자의 <모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