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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불법) 가이드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짧고 굵은 비공식 근무 일지

by 삐빕 Mar 22. 2025
Pixabay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208636/


심심풀이 구인공고 탐험

심심할 때마다 한국인 커뮤니티의 구인공고나 벼룩시장 게시물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괜찮은 물건을 싸게 살 만한 게 있거나, 아니면 해볼 만한 아르바이트라도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미술관에서 일할 가이드를 모집하는 공고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위해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여행사 사무실은 따로 없었는지 우리는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다행히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면접이 진행되었다.


불법이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일자리

사실 프랑스에서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공인가이드’만이 공식적으로 투어를 진행할 수 있다. 프랑스 관광법(Code du Tourisme)과 문화재 보호 관련 법규에 따라 공인가이드는 반드시 자격증을 소지해야 하고, 현장에서 공인카드(carte professionnelle)를 제시해야 한다.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인가이드들은 자격증을 목에 걸고 송수신기를 통해 다수의 관광객들을 이끌고 투어를 진행한다.


그런데 내가 면접을 본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투어는 ‘프라이빗’ 형태였다. 최대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인원만 받아 진행하기 때문에, 송수신기 없이 일행처럼 보이며 경비의 눈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불법이라는 점이 신경 쓰였고, 비슷한 투어가 루브르에서 발각돼 모두 쫓겨났다는 기사를 전해 듣고 더 걱정이 됐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가이드로 일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너무 컸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시작해 보기로 했다.


드디어 공부한 걸 써먹는다!

오르세 미술관 투어 시작 전에 여행사 담당자는 미리 필수 주요 작품 몇 가지를 짚어주었다. 나는 이 작품들을 토대로 전체 투어의 내용을 스스로 구성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루트가 간단해 엄청난 동선을 짤 필요는 없었고, 시대 순으로 자연스럽게 작품을 소개하면 충분했다. 나는 미술사를 처음 공부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궁금증과 흥미를 중심으로 설명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 역시 미술이나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비전공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과외 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던 내용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담당자와 현장에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며 피드백을 받고 나니 곧바로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첫 번째 팀은 중년의 부부였다. 내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셨고, 나와 동갑인 딸이 있다고 하셨다. 티켓 발권을 기다리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두 분 모두 학구열이 높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공부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첫 손님으로 이런 팀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 번째 후기는 별점 5점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가이드 체험

미술관에서 일하는 것 자체는 즐거웠고 작품을 설명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3주 정도 지나자 매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에 조금씩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성의 없게 투어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같은 내용만 반복하는 상황이 언젠가는 한계에 이를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프랑스인 공인가이드 한 명이 내게 와서 지적을 했다. 여기서 설명을 하려면 반드시 공인가이드 자격증을 걸고 하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법임을 알고 경비의 눈을 피해 소규모로 투어를 진행했지만, 막상 해보니 가이드의 눈에는 가이드가 너무나 쉽게 보였다. 경비들 역시 사실상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상황을 직접 마주하니 굳이 계속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야 쫓겨나면 그만이지만, 나와 함께 있는 손님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의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공식적인 이력서에 기입할 수 없는 짧은 경험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내게 다양한 깨달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스스로의 능력과 부족한 점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고, 앞으로 이를 보완하면 훨씬 즐겁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진지하게 공인가이드 자격증을 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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