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된 프랑스 남부여행 - 출발 편
생테티엔에서의 어학 코스가 9월 중반에 시작하고 한 달이 좀 넘은 시기. 아직 개강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10월 말에 무슨 긴 휴가가 있단다. 한국에 이런 휴가가 없다 보니 나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이벤트였는데,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는 휴가, ‘뚜쌍(Toussaint) 바캉스(vacances)’였다. 프랑스어로 ‘Tous’는 ‘모든’을, ‘saint’는 ‘성인’을 의미한다. 가톨릭에서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휴가는 11월 1일을 중심으로 2주 정도 주어진다.
이때 프랑스 사람들은 묘지를 방문해서 고인을 추모하기도 하고 성인들의 삶을 기념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런 건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학기 중간에 심지어 이렇게 초반에 있는 휴가는 즐겨줘야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인 학생들도 학기 중에 피로를 풀고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긴다. 또, 시기도 놀기 좋은 가을이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어학원의 친구들도 둘씩 혹은 무리 지어 함께 그룹으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설레어했다.
나도 어딘가 떠나고 싶었다. 제일 친한 친구 예진이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이 좋은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게 됐다. 일단 목적지는 프랑스 남부로 정했다. 몇 개 마음에 드는 도시를 골랐다. 그리고 이동 방향에 맞추어 들를 도시의 여행 순서를 정했다. 기차 편을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어떤 곳은 호텔, 어떤 곳은 호스텔, 어떤 곳은 도미토리로 다양하게 잡았다.
3박 4일 일정의 테마는 나름 '예술 여행'이었다. 남부를 대표하는 휴양지인 니스(Nice)를 시작으로 피카소가 사랑했다던 앙티브(Antibes)를 들렀다가 마르세유(Marseille)로 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여행이 끝난다.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벌써 이 루트에서부터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보통 일반적인 여행은 하나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잡고 거기서 며칠을 길게 머문다. 그 기간 중에 교외의 작은 도시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숙소가 있는 대도시로 돌아오는 식으로 진행한다. 내가 짠 루트는 거의 매일 이동만 하도록 만든 코스였다. 정확하게 대입하기는 어렵지만, 거리로만 봤을 때 한국에서 3박 4일 코스를 서울 - 성남 - 대전 - 세종으로 잡은 것과 비슷하다. 외국인에게 누가 이런 코스를 추천하겠는가?
이전까지 나는 국내조차 한 번도 혼자 여행한 적도 없고, 해외에서 온전히 혼자 있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치기 어린, 너무나 어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야심 찬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 되었고, 나는 생테티엔의 기차역에서 TER를 타고 대도시인 리옹으로 가서 TGV를 갈아타고 니스로 가야 했다. 일단 TER를 잘못 탔다. 무슨 고속버스처럼 하나의 플랫폼에 여러 기차가 수시로 들어오고 떠날 줄 상상도 못 했다. 혹시나 늦을까 봐 기차역에 일찍 와서는, 내 기차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기차를 확인 없이 타버렸다. 그 기차는 내 목적지인 리옹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도착했다. 내려서 역무원한테 내 기차표를 보여주며 여기가 어디냐 물었더니, 정말 황당한 얼굴로 너 왜 이걸 타고 왔느냐고 되물었다.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다시 그곳에서 리옹으로 갈 수 있는 기차를 끊었다. 정말 다행히도 원래 일정이 리옹에서 TGV를 기다리는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일정이라, 그렇게 한번 삐끗하고서도 빠듯하지만 무사히 리옹에 도착해서 니스로 가는 TGV를 탔다.
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기차가 멈췄다.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아무리 집중해도 들리지 않았다. 여러 번 같은 내용이 나오다 보니 그나마 뜨문뜨문 단어들을 캐치해서 알아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할지 몰라 극도로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나만 정신이 없어 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평온해 보였다. 앞에 앉은 흑인 아주머니에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친절하게 '철로에 나무가 쓰러져서 기차가 멈추었다'라고 알려주고는 다시 원래 읽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기차는 세 시간을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고, 승객은 모두 그 시간 동안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가뜩이나 촉박한 내 일정은 세 시간 늦춰지고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된 상식 아닌 상식은, 남부로 가는 TGV는 워낙에 연착이 잦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다들 익숙한 거였다. 초행인 나만 그렇게 불안에 덜덜거리고 있던 거였다.
그게 여행이 잘 풀리기 위한 '액땜'이고 나머지 일정이 술술 잘 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운은 끝없이 몰려왔다. 물론 그중 반은 내 무지함이 만들어낸 것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