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아버지 회사의 상황은 이랬다. 공장을 2개 증축한 상황이었다. 2010년 경이었을 것이다. 중국이 제조업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제조업은 초토화가 되었다. 원가 경쟁력 자체에서 상대가 되질 못했다. 아버지 회사는 이 파도에 정면으로 깨졌다. 20억의 채무를 진채로 회사는 망했다.
아버지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며, 보증을 섰던 어머니도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다. 빚쟁이들과 법원 관계부처에 의해 우리 집안은 추적의 대상이 되었다. 지하에 노래방이 있던, 유흥가 상가의 3층으로 이사했다. 여름이면 바퀴벌레가 나오고 겨울이면 외풍이 들었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버지는 무너졌다. 방황했다.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가 마트에서 힘들게 일해 벌어온 돈으로 이어가야 했다. 당연히 돈이 안되기에 끝없는 현금서비스로 돌려 막아야 했다. 부부간의 싸움은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 이 집안에는 희망이 없었다. 니코틴과 알코올, 폭력이 낭자했다. 내 동생은 고작 다섯 살이었다.
학교 갈 버스비가 없을 때가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준 긴급구호물품을 먹었다. 가끔은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가 줘 터진 채로 학교에 가곤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날 못 본 체 했지만, 한 명의 선생님은 날 외면하지 않았다. 제2의 아버지 같은 아저씨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전혀 그럴 이유도 없었음에도 그렇게 해주셨다.
나 또한 홧김에 막장으로 살려고 했었으나, 어린 동생이 있었고 선생님도 계셨기에 공부에 손을 놓지 않았다. 학원 따윈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학교에서 열심히 했다.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나는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대학을 가려면 돈이 안 드는 대학을 가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큰돈을 벌어야 했다. 옆구리 터진 이 집안을 수습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있는 자리가 최전선이었다. 내가 밀리면 다 죽는 상황이었다.
내가 가진 머리와 엉덩이로 최선을 다했다. 전액 장학을 받으며, 빠르고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은 학교는 해양대였다.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 없었다. 서성한중경외시 급의 선택지도 있었으나, 나는 오로지 돈만 보고 대입을 결정했다. 사립 대학을 가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없어질 판국이었다.
이 시기에 가난이 뭔지 알게 되었다. 성공과 부를 맘속에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