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kid is natural.

장고 : 분노의 추적자 中

by 언더독

Freedom - Django Unchained

https://www.youtube.com/watch?v=xdOykEJSXIg


살면서 무언가에 몰두해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특정한 하나의 목표 외에는 모두 포기하는, 러시의 형태를 띤다. 사람이 이러한 러시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실패했을 때의 손실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발생하는 손실 외에도, 다른 희생했던 부분들을 회수할 수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러시는 사회적 잣대로 보았을 때, 바람직하게 느껴지든 그 반대의 경우에든, 이러한 근본적인 속성은 같다. 매몰비용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개개인의 인생은 총 3가지의 경우가 있다.


1. 두려움으로 인해 시도하지 않고, 안정을 추구하는 경우.

2. 시도했고, 실패하는 경우.

3. 시도했고, 성공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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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분석한 내용을 담은 것이 오늘의 글이다.



1. 두려움으로 인해 시도하지 않고, 안정을 추구하는 경우.


다수이다. 나는 이들이 성향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굴복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부분 한 달 번 돈으로 한 달을 살고 있다고 보인다. 나와는 섞이는 게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다. 나는 성격이 예민하여, 굴복하는 것 그리고 한 달 주기성 연명의 끝에 서있는 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냥 눈감고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 이것이 맞다 그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화가 생긴 다기보다는, 연결점을 잘 찾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면 꼭 사회부적응자가 된 기분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거의 혼자 지낸다.



2. 시도했고, 실패하는 경우.


자유인이 되기 위해 뭔가를 진중하게 도전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진중하다는 것은 최대한의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진중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실패한다. 나 역시, 많은 실패 훈장을 달고 있는 실패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켜보면, 이들은 실패를 거듭하기는 하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무슨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추구점이 명확해서 그렇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치를 느끼는 것들은 수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포기한다고 해봐야 딱히 하고자 할만한 일이 없어서 그렇다. 사는게 심심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굳혀놓기에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 부류의 사람들은 칼이라도 뽑아 휘둘러라도 본 자들이다. 최소한 그럴만한 배짱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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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대부분의 실패 속 하나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감사하게도, 대단하진 않지만 준수하게 나아가고 있다.



3. 시도했고, 성공하는 경우.


아직까지, 내가 직접 본 적이 없다. 나만큼 척박한 환경을 가졌던 사람을 제대로 옆에 두고 본 적이 없다. 나만큼 까진 아니더라도, 기반이 없다시피 한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하여 스스로의 힘을 통해 완전체 자유인으로 탈바꿈한 사람을 직접 옆에 두고 본 적이 없다. 창업주들의 자서전들을 보며 간접체험을 했을 뿐이다. 유튜브를 보며 간접체험을 했을 뿐이다.


초중고대학을 거치며, 이런 사람 한 명 실제로 못 본 것을 보면, 개천에서 난 용을 보는 것이 정말로 레어 한 일인 듯하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물음을 해보자.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나는 이것이 유전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적인 능력차이 때문에 이러한 갈라짐이 생긴다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성'이 얼마나 좋은 출력을 내는지에 따라 저러한 차이가 생긴다고 본다.


자유인이 되길 소망한다는 것은, 인생의 자치권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자, 자동차, 집 등의 표상적인 것들보다 독립에 훨씬 큰 가치를 둔다. 돈이 남아돈다고 하여도 메이커 아파트는 필요 없으며, 벤츠도 필요 없다. 얼굴 반반한 여자가 있으면 기분 좋기야 하겠지만, 그 여자가 내가 20년간 피땀 흘려 이룬 독립 제국에 위해가 될 것 같은 소프트웨어를 들고 있다면, 도망갈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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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남들에 비해 우수하고 바람직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다수에 비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은 명확하다. 소수의 이들은 대체로 철학, 종교, 예술에 관한 내용을 자주 접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가치는 돈이 아니기 때문에 행동 전반에 있어서도 다른 이들과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대중적인 성향을 띠지 못한다.


만약, 개개인이 가진 이성이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들은 긍정적인 쪽으로 비범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성이 부족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면 경제적 무능력 또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수긍이 된다. 이성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 선악 또는 미추를 식별하는 능력.


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추한 것인지를 식별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나는 이것이 후천적인 훈련으로 발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IQ 또는 EQ가 모두 다른 것처럼, 이 또한 그럴 것이라고 본다.


만약, 이성이 후천적으로 훈련 가능하다고 볼 만큼의 타당성이 있으려면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 비교적 쉬워야한다. 그리고 사람의 근본이 비교적 쉽게 바뀌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성과 논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며, 그것을 직시할 것인지 외면할 것인지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순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고 사람의 근본은 바꾸기가 어렵다.


나역시, 처음 어떠한 이론이나 주장을 들으면 그것을 삐딱하게 듣는다. 왜냐하면 그것인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보는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다. 또 성격이 예민하고 경계성이 높아 그렇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러다가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면 사실 관계를 직시하기 시작하며, 그것의 논리가 맞다고 수긍이 되면 점차 근본이 변한다. 그래서 발전이 있다. 5년 전,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내 글을 구독해주시는 분들은 이성이 평균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느껴진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의 글을 계속해서 읽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102316.jpg 모든 사람이 내 글을 좋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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