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ry is fleeting, but obscurity is forever.
영광은 덧없지만 무명(無名)은 영원하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죽음은 보장되어 있다. 그 어떤 시중의 보험 상품보다도, 가장 신뢰성 있다.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100% 보장된다.
나는 한국 메이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언더독'이라는 이름을 '레전드'로 올려놓으려 한다.
덧없는 영광이 영원한 무명보다야 나으니까.
죽기 직전에 내 인생을 합리화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게 두렵다. 젊음을 지나 보낸 후 또는 죽기 직전에 합리화하는 언행은 열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무리 육신으로 고개를 젓더라도, 마음 깊숙한 자아가 그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영광이 덧없다 한들, 무명이 영원한 것보다야 덧이 없으리.
숨이 다하는 것은 얼마나 아플지 궁금하기는 하나, 크게 두렵지는 않다.
영광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다른 사람하고는 관련이 없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서두에 올린 문장과 결이 비슷한, 또 다른 말을 한 적이 있다.
"Death is nothing; but to live defeated and inglorious is to die daily."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패배하고 불명예스럽게 사는 것이야 말로 매일 죽는 것이다.)
죽음이야 너무나 명쾌하기 때문에 설명이 불요하다. 패배하고 불명예스럽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2024년 10월의 한국 사회에서 패배하고 불명예스럽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글의 주제이다.
통계적으로 인구의 75%는 근로노동자이다.
평균 소득 기준이 아닌, 중위 소득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겠다. 평균 소득으로 따지면, 대기업과 전문직에 들어가는 소수의 고소득자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적인 대다수를 말하려 한다. 중위소득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평균의 중간지점이라고 편히 해석하면 된다.
중위 소득 기준으로 242만 원이다. 저게 실제적인 평균 월급이다. 좀 더 받는 사람은 세후 300 근처 가는 거고, 좀 덜 받는 사람은 세후 200 근처로 간다.
이걸 시급으로 환산해 보자.
9 to 6 / 주 5일로 가면, 밥시간 빼고 하루 8시간 x 5 = 40h
40h x 4주 = 160h
242만 원 / 160h = 1.5만 원
시간 외 근무, 회식, 잡일 하는 시간까지 다 합하면 만 원대로 감소한다고 보면 된다. 일반 사기업, 사업체에 칼퇴가 있기는 아주 어렵다.
대부분은 일반 사기업, 사업체에서 일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숫자가 저렇게 된다.
나도 안다.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런 것들이 가족, 우정, 사랑, 건강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개인적으로는 명예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급 1만 원대의 위치로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건, 어떤 주장을 하건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사실이 사실로서 존재한다.
말 그대로, 누가 신경 쓰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지위 상태로 머물러 있는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패배이다. 불명예이다. 나폴레옹이 말하는 '매일 죽는 것'이다.
왜 머물러 있냐는 것이다.
머무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누가 칼 들고 그걸 못하게 할 리도 없을 것이다.
주변을 보면. 또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면.
시급 3만 원 이상부터,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 시급 5만 원 이상부터, 타인의 존경심을 확인하게 된다. 시급 10만 원 이상부터, 자기가 하는 일의 탁월함에 있어 타인의 완전한 존경과 경외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인 근로노동으로는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글로 '레전드'가 되려고 한다.(주식 투자도 있다.)
나는 그리고 내가 쓰는 글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숫자와 철학 베이스이다. 경제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영화, 책, 시사, 음악, 역사, 정치, 종교, 예술 등의 장르가 깃든다.
그래서 위와 같이, 시급으로도 분석을 해보는 것이다.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회' 파트에 가까운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숫자로 생각해보지 않는 일상의 현상들을 숫자와 철학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실이 명쾌하게 보인다.
꽤 자주, 이런 시각이 참신함을 자랑할 때가 있다. 그만큼 우리 머릿속에 클리셰로 자리 잡힌 편안하고 당연한 생각들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은, 읽는 사람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나는 그런 글이 나올 때, 창작의 기쁨을 느낀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를 보면, 아이가 아빠와 함께 길을 걸으며 하는 대사가 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들었던 농담을 아빠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There was a man who was drowning, and a boat came, and the man on the boat said "Do you need help?" (물에 빠진 남자가 있었고 보트가 왔데. 보트에 있던 남자가 "도와줄까요?" 물어봤데.)
and the man said "God will save me". (물에 빠진 놈이 "신이 살려줄 거야"라며 괜찮다고 했데.)
Then another boat came and he tried to help him, but he said "God will save me", (나중에 다른 보트가 와서 그 사람을 도우려 했는데, 그때도 "신이 살려줄 거야"라고 거절했데.)
then he drowned and went to Heaven. (그러다 결국엔 익사해서 천국에 갔데.)
Then the man told God, "God, why didn't you save me?" (남자는 신에게 "신이시여, 왜 저를 살려주지 않았나요?" 물어봤데)
and God said "I sent you two boats, you dummy!"(그러자 신 왈, "그래서 보트를 두 대나 보냈잖아, 이 멍청아!")
나는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특히, 과거의 나와 같이 가난하고 폭력적인 삶을 강제로 부여받게 된 10대들에게.
저 농담에서 나오는 '신'의 역할을 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
세상에 퍼져있는 다양한 클리셰들에는, 문제가 많다. 사실이 아닌 것들이 많다. 앞 뒤가 맞지 않음에도, 사회 저변에 퍼져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서사들이 많다.
이는 흔하디 흔한 어른들의 '좋은 말'에서 많이 등장한다. 이는 흔하디 흔한 학교 교사, 대학 교수들의 '맞는 말'에서 많이 등장한다. 이는 흔하디 흔한 뉴스 채널에서도, 예능 채널에서도, 영화, 음악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런 걸 주류라고 한다. (주류라서 편안한 자리이고, 주류라서 적이 생기지도 않는 자리이다.)
통계적으로 부자는 인구 대비 1% 안쪽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류가 아니다. 비주류이다. 내가 본 부자들은, 저러한 클리셰를 삐딱하게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그와 같은 논리 방향으로 삶의 정력을 쏟아낸 사람들이었다. 주류와 주류 사람들의 말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가문이 내려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타인에게 영향력과 경외감을 줄 수 있는 명예를 쟁취하고자 하는 인물은 주류를 따라가면 안 된다. 비주류를 따라가야 한다.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가.
나와 같은 결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Allegri - Miserere mei 1638
https://www.youtube.com/watch?v=H3v9unphfi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