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희정 May 09. 2024

인생이란 꽃이 지기 전에

1. 라라크루 금요문장     

'세상의 나무들은 잎이 진다고 나무로 존재하기를 포기한 적이 없어. 오히려 그걸 시간의 향기로 버텨내지. 한평생 살며 게으른 나무를 보질 못했네."    

출처. 이숲오, <꿈꾸는 낭송 공작소>      


2. 문장에서 시작된 내 삶의 이야기


얼마 전 대상포진이란 병에 걸렸다. 금요일 밤, 왼쪽 어깨에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듯한 통증을 처음 느꼈을 때 나는 그 녀석을 근육통으로 인지했다. 주말 내내 수건으로 뜨거운 물을 적셔서 살짝 짜고 어깨에 얹는 온찜질을 반복했다. 그래도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다음으로 집에 있던 부항기로 부항을 떠보았다. 어깨를 따라 검붉은 부항 자국이 꿈틀대는 용 문신처럼 새겨졌지만, 역시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요일 밤이 되자 몸이 으슬으슬 추워져 이불을 꽁꽁 덮었다. 그날 밤, 오한과 통증으로 겨우 잠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왼쪽 목에 오돌토돌한 붉은 반점이 5개 정도 올라왔다. 그때까지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왼쪽 머리에서 어깨를 지나 손가락 끝까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민감한 감각이 생겼다. 만약 누군가가 왼쪽 몸을 살짝 스쳤더라 손톱으로 긁히는 듯한 과장된 통증에 소름이 쫙 돋아날 것만 같았다. 어리석게도 일하면 오히려 좋아지리라 믿으며 출근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하니 다시 열이 났다.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아 바로 잠이 들었다.     


화요일 아침, 일어나니 반점이 왼쪽  뒤통수까지 올라왔고 그중 일부는 수포로 변해있었다. 마침내 이 모든 증상이 단순 근육통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병원에 출근하자마자 진료부터 접수했다. 진료실에서 바로 확진을 받았다. 입원이 가능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게 어떻겠냐는 원장님의 말에 일단 약을 먹으며 버텨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없을 때 남은 동료들에게 덮칠 일의 쓰나미를 못 본 체하기 어려웠다.   

   

대신 오전 일을 다 끝내고 반차를 냈다.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침대에 막 누우려는 찰나,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장님이 아무래도 입원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고. 포진이 더 번지면 그때는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그 말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출근을 못 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답하고 짐을 꾸렸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에 갔다. 의사는 내 상태를 보더니 두말없이 입원 서류에 사인해 주었다.      


결국 병원 신세를 졌다. 그날부터 5일간 병실에서 지냈다. 약에 취해 자다가 침대에 붙어있던 탁자에 식판 놓고 가는 소리가 나면 일어나는 패턴을 반복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으니 내가 누구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몇 시간마다 병실에 들러서 내 상태에 대해 질문하는 의료진들의 눈에 나는 단지 그들이 다루어야 할 질병의 하나일 뿐이었다. 괜스레 설움도 올라와 마음조차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환자이기를 거부하고 싶어 그나마 눈뜨고 있던 시간에는 계속 책을 읽었다. 글자들이 흡사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눈앞에서 둥둥 떠다녔지만,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글자를 쫒는 과정이 무기력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병균과 전쟁하는 내 몸에 지원을 보내는 행위처럼 말이다.  그건 아픈 시간조차 나다움을 이루려던 처절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사이 몸의 포진들은 사나운 기세로 커졌다가 차츰 이집트의 미라들처럼 말라갔다. 동시에 근육통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마침내 토요일 오전에 퇴원 수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니 누워있기 싫었다.     


아파보니 꽃은 피는 순간부터 지기 시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겠다. 건강은 내가 가진 가장 큰 일시적 행운이었다. 대상포진은 결국 나아질 테지만, 내 몸도 언젠가 지는 꽃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새삼 더 잘 살아야겠다고. 후회 없이 사는 삶보다 후회를 많이 만들더라도 무엇이든 해보며 인생이란 꽃을 활짝 피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내 시야에 간밤 내린 비로 거리를 가득 덮은 낙화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그 광경에 슬픔만 잔뜩 끌어당겼을 나였지만, 그 순간 내 가슴엔 슬픔대신 작은 바람 같은 감동이  일었다.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금요문장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 방랑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