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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27. 2024

친구의 기준은 오직

라라크루 수요질문.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의 기준.

한때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다. 나와 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투, 태도, 행동. 모두 싫었다. 특히 그가 언성을 높이고 막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구어졌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가슴 한편이 죄어들었다. 건드리면 오므라드는 미모사처럼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위축되는 나날이 늘어났다. 그래도 매일 봐야만 했다. 그는 내 상사였다. 이대로 살다가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 몸까지 상할 것 같았지만, 막상 그만두면 대책이 없었다. 참고 또 참았다. 일하면서도 가능한 한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마음속으로 그에 관한 생각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더는 그를 미워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마지막 인사할 때는 진심으로 웃으며 잘 지내라 말했다. 그를 향했던 화가 많이 지워졌을 때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바로 그였다. 일과 관련하여 내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전화를 끊으며 그가 언제 시간이 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자고 말했다. 비록 전화상이었지만, 대화가 이전보다 한결 편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만약 이 사람을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더라면 조금은 잘 지낼 수도 있었겠다고.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을 좋고 싫게 만드는 건 그 사람 자체보다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나면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알고 보면 인정스럽고 부드러운 사람도 직장에서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사람은 착하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되레 무능력한 사람을 흉볼 때 많이 쓴다. 마치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보는 시선과 같다. 예전에는 저런 상사는 되지 말아야지 수없이 다짐했던 적도 있었다.


막상 팀장이 되니 개인보다는 조직을 위해 쓴소리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안 좋은 얘기를 들은 팀원은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으리라. 동료에 대한 불만을 말하며 내가 나서서 명확한 선을 긋고 따끔한 소리를 해주길 원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때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자고 말했다가 돌아온 건 오직 원망이 잔뜩 쌓인 눈초리였다. 한 번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한 직원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가 세상 억울한 얼굴로 자기 합리화만 쏟아내는 그와 끝나지 않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직원에게는 중립적인 마음을 가지기 힘들었다. 싫은 사람을 또 보는 순간부터 그곳은 지옥이 된다. 직장에서 모든 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는 노력은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일이었다. 단지 싫은 사람뿐만 아니라 좋은 감정이 생기는 사람도 포함해서 말이다. 내 가족에게도 상처받는 날이 부지기수이다. 하물며 타인에게 어찌 좋은 감정만 생길 수 있으랴. 내 시간을 파는 곳에서 감정까지 소모하고 싶지 않은 게 본심일 뿐이다.


직장 밖을 나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몸을 옭아매는 위치에서 벗어난 시간이기에 비로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정한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세속적 가치 기준은 없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만났을 때 가식 없는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편안한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나는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은 마음에 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느껴진다. 걱정과 애정 어린 눈빛, 사소한 배려심,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희생정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에 그보다 좋은 건 없다. 설령 나에게 쓴소리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위한 말임을 알고 있기에 귀를 활짝 열고 듣게 된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듯 질긴 모습을 벗어던지고 야들야들한 본모습을 드러낸다. 못난 속내를 말해도 다음 날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정신적 허기를 달래는 소울푸드 같은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친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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