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얼마 전 인터넷에서 멋진 노트를 한 권 샀습니다. 버건디 색상의 가죽 커버로 된 노트인데, 그 클래식한 생김새에 반했죠. 딱히 뭘 쓸 것도 없었지만, 이니셜까지 각인해서 구입했습니다.
가죽 냄새가 풀풀 나는 게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여기에 무얼 써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노트는 여전히 백지상태로 책상 위에 누워있습니다.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노트라니, 웃기는 일입니다. 노트는 씀으로써 그 가치가 생기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나는 왜 이 멋진 노트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는 걸까, 가만히 앉아 생각해 봤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바로,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었어요. 이 멋진 노트에 뭔가 대단한 걸 적어야 할 것만 같았거든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완벽주의가 좋은 성향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로도 인생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던, 오프라인의 시대가 그랬죠.
이제 완벽주의 성향은 걸림돌이 될 때가 더 많습니다. 특히, 저처럼 '어중간한 완벽주의'는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렇다고 결과물이 딱히 완벽하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집필은 예술가처럼, 편집은 엔지니어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주의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한 문장 쓰고 수정하고, 한 문장 쓰고 수정하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칩니다. 네, 제 얘기입니다.
어제는 우연히 재즈리안님의 전자책 글쓰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중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집필은 예술가처럼 자유롭게 하고, 편집은 엔지니어처럼 체계적으로 하라고요. 딱 제게 필요한 조언이었습니다.
형편없더라도 일단은 초고를 빠르게 쓴 뒤, 한 번에 편집하라는 말입니다. 즉, 집필과 편집을 분리하는 것. 저 역시 아직 연습 중인 부분입니다.
애초에 완벽한 글은 없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조차 완벽한 글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작품이 지나치게 간결하고 감정표현이 부족하다는 비평도 있었으니까요.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완벽한 글을 쓰려는 마음은 때때로, 아니 자주 방해가 됩니다. 저와 같은 어중간한 완벽주의자라면요, 앞으로 조금은 대충 쓰는 연습을 해봅시다.
자, 연습이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저는 여기까지 글을 단숨에 써 내려왔습니다. 물론 엉망이지만요. 지금부터 엔지니어처럼 까다롭게 퇴고 작업을 해야겠지요. 발행될 때쯤엔 꽤 괜찮은 글이 완성되리라 믿습니다.